땅 속에서 운무가 솟구쳐올라 뿌연 안개가 자욱하고 우르릉거리는 굉음과 땅의 흔들림이 마흔아홉 날을 이어지더니, 다시금 땅이 조용해지고 안개가 걷혔다.

 사람들이 그제야 두려움에서 벋어나 밖으로 나와 보니 새로운 오름이 하나 떡하니 생겨났다. 이에 사람들은 상서로운 산이라 하여 서산이라 불렀고, 조정에서는 태학박사를 탐라로 보내어 조사케 하였다. 그는 주민들의 목격담을 수집하고 산의 형태를 그려 조정에 보고하였다.

 고려 목종10년의 일이다.

 여기에 기록된 서산을 두고 여기다 저기다 말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이곳 군산으로 정리가 된 분위기이다. 군산 전경 우람한 산체와 두 개의 봉우리가 인상적인 오름이다.

▲ 군산 전경. 우람한 산체와 두 개의 봉우리가 인상적인 오름이다.

 군산, 또는 군뫼, 굴메 등으로 불리는데 그 이름 역시 본래 없던 것이 새로 생겨났음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군'이라는 단어는 군살 군더더기 군것질 등으로 쓰여 가외의 것을 뜻하는 접두사이고, '굴' 역시 제주의 방언에 '굴루이' 또는 '굴룬' 등으로 쓰이는 가외의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고 보면 '원래 없었는데 가외로 생겨난 오름'이라는 뜻을 가진 오름이 되는 것이다.

 물론 군막을 친 것과 비슷한 형상이라 하여 군산이라고 한다는 해석도 있기는 하지만, 그 경우 굴메에 대한 해석이 없어 이는 군산이라는 이름만 놓고 내린 억지 해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와 대평리 사이에 위치하는 오름으로 지번은 창천리에 속한다. 해발 335m 비고 280m로 해안가에 있는 오름 중에서는 산방산 다음으로 높은 오름이다. 특히 오름의 둘레가 8km를 넘어 몸짓이 상당히 큰 오름이다.

 형태는 원추형 오름으로 굼부리가 없이 봉우리가 솟은 이른바 숫오름이다. 정상에 두 개의 솟은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송아지 머리에 이제 막 뿔이 돋아나는 모습과 닮았다.

▲ 등산로 마다 이름을 붙여 놓았다. 추억의 길, 사색의 길, 소망의 길 등

 오름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인데, 안덕면 감산리에서 대평리로 이어지는 '진모루'라는 경사 급하기로 소문난 고갯길이 있다. 이 고개 중간쯤 뉴제주팬션 입구에서 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정상 턱밑까지 도로가 만들어져 있다.

 또 하나는 평화로와 일주도로가 만나는 창천 삼거리에서 중문동 방면으로 500여m가면 오른편에 군산 산책로라는 표지가 있고 이 농로를 따라 들어가면 주차장에 이른다.

 주로 많은 이들이 이 길을 택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곳에 명사쉼터라는 정자도 마련되어 있고 여러 가지 운동시설이며 화장실등 편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또한, 오름이 덩치가 크다보니 이 등산로 입구 자체가 높은 곳에 위치하여 - 마치 한라산 등산로 입구가 한라산 중턱에 해당하듯이- 여기에서 내려다보이는 해안선의 풍광도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언제인가 바람이 심하고 파도가 으르렁거리던 날 이곳에 올랐는데, 풍랑을 피해 수많은 어선들이 이 앞바다로 피양을 왔는데 그 모습이 마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한 장면을 연상케 하였었다.

 등산로로 접어드니 센스 있게 '추억의 길'이라고 이름 짓고 명찰까지 달아놓았다. 좋은 생각이다. 또 무슨 이름의 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려나. 바닥에 침목을 깔아 등산로를 정비해 놓았다.

 초겨울 잔뜩 찌푸린 날씨인지라 중무장을 하고 나섰는데 이내 한 꺼풀을 벗어내야 했다. 사자암이라는 안내표지가 나타난다.

 "이곳은 바위의 형태가 누워있는 사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이곳 군산은 예래동의 설촌과 연관된 곳 이기도하다. '한 고승이 지나가다가 동쪽에 있는 섬이(범섬)호랑이 형상이어서 마을에 재앙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서쪽에 있는 이 군산을 사자로 칭하여 사자가 온다는 뜻의 예래(猊來)로 지어주어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이 바위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 사자암

 중턱에 다다르니 산불을 감시하는 경방초소가 있고 두 갈래 길이 표시되어 있다. 구시물을 돌아 정상으로 가는 길과 정상으로 바로 가는 길, 아 그리고 보니 길이 하나 더 있다. 진지동굴로 가는 길이다.

 먼저 진지동굴을 다녀오고 정상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여느 오름과 같이 이곳에도 여기저기 제국주의 일본이 남긴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다시 한 번 숨을 몰아쉬니 정상이다.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동쪽 봉우리가 조금 높아서 이곳이 정상이다.

 바로 앞에는, 가장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 대평리가 이 오름을 병풍으로 삼아 아늑하게 자리하고 있고, 서쪽으로 산방산 송악산 그리고 가파도와 마라도로 이어지는 해안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이 그림의 마지막, 용의 그림에 눈을 그려놓듯이 형제섬이 서있어서 해안절경의 멋을 더한다.
참으로 아름답다. 바로 옆에 산방산이 우람하게 서있다. 봄날이면 머리에 구름을 둘러 구름모자를 자주 쓰곤 하는 오름이다. 동쪽으로는 서귀포 시가지와 범섬 섶섬등이 조망되고 테우를 닮은 월드컵 경기장이 앙증맞다.

▲ 정상에서 보이는 산방산 송악산 등의 해안경관

 두 개의 봉우리 사이에 평지가 있는데, 이른바 용의 머리에 쌍봉이 솟은 쌍봉기어용두(雙峰起於龍頭) 형국이라 하여 명당 터로 알려져 있으나, 묘가 한자리도 없다.

 이곳에 묘를 쓰면 그 자손은 발복하나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하여 금장지로 여기는 탓이다.

 동행인 길손이 오름 중턱으로 둘레길이 새로 났다고 해서 걸어보기로 했다. 서쪽 봉우리를 지나 나무계단이 깔린 하산 길로 내려가자 이내 시멘트도로가 나온다. 진모루로 내려가는 길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시멘트 도로에 녹색 페인트를 발라놓았다. 사연이 없지 않을 터. 십 수 년 전 당시 남제주군청에서 이곳에 시멘트도로를 개설하였다.

 뭐 좋은 뜻으로, 이 오름에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러 오는 관광객들이 많아서 그들의 편의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단이 생겼다.

 본래 농로는 농지가 있는 경우에 개설을 하는 것인데, 이곳에는 농지가 없으니 위법논란이 불거졌고, 또 서쪽에서 보면 마치 이마빡에 하얀 반창고를 척하니 부처 놓은 듯 보기가 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고심의 결과로 페인트가 발린 농로가 태어나게 되었다. 씁쓸하다. 사람의 편의만 생각하고 자연에는 생각이 모자랐던 것이다.

 도로를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왼편으로 걷기 좋은 오솔길이 보인다. 사색의 길이라고 이름 지어진. 오름의 중턱을 따라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길이 이어지는데 걷는 내내 바닷가 해안선을 조망할 수 있도록 개설되었다.

 싸락눈이 흩뿌려진다.

 그러고 보니 이번 겨울 들어 처음 맞이하는 눈이다. 바닥에 깔린 침목 사이사이에 계절을 잘못 판단한 제비꽃들이 피었는데 이들에겐 혹독한 선물이 된 셈이다. 우리에겐 오름에서 맞이하는 축복이지만.

▲ 화산석이 절벽을 이루고 섰는데 이 바위에 부처손이 많이 자란다. 뿌려지는 눈도 함께 카메라에 잡혔다.

 붉은 화산석이 절벽을 이루고 있는 곳에 부처손 군락지라는 푯말이 서있다. 부처손, 참 특이한 넘이다. 평소 습한 곳을 싫어하여 건조한 바위틈에 사는데, 그런데도 평소에는 잎을 모두모아 주먹을 쥐듯 웅크리고 있다가 비가 오면 반갑다는 듯이 잎을 활짝 펴고 즐거워하는 녀석이다. 부인병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 구시물. 득남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전해진다. 득남은 잘 모르겠으나 화산석을 뚫고 나오는 물이니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는 말은 수긍이 간다.

 길 중간에 제법 넓은 공터가 있고 구시물이라는 간판이 서있다. 쉼터도 있고 목마른 나그네를 위해 바가지도 주욱 걸어놓았다. 또 여느 약수터와는 다르게 세숫대야와 받침대를 만들어 놓았다. 아마도 이 약수가 피부에 좋다는데 따른 배려일 것이다.

 "군산 산중턱에서 흘러나오는 이 약수는 구시물 또는 굇물이라 불리고 있으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아 옛날부터 기우제를 지낼 때 이 물로 제사를 지내면 비가내리고, 남자형의 숫오름에서 나오는 물이라 하여 아들을 소원하는 사람이 이 물로 소원을 빌면 효험이 있다고 하며, 또 불치의 피부병도 이 물로 목욕을 하면 깨끗이 나았다고 전해진다" -안내표지에서-

 지금은 삼다수로 유명한 제주이지만 지하수가 개발되기 이전 제주에서 물은 귀중한 것이었다. 모두 한 모금씩 마시는데 득남하는데 효험이 있다는 구절에 한마디씩 농이 오간다.

 이렇게 정상에 이어 오름이 허리를 돌아 다시 내려오는데 어서 돌아가라는 듯, 등뒤로 다시 싸락눈이 뿌려진다. 이제 겨울 산행을 준비해야하는 시기인가 보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