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를 따라 가다가 원물오름을 지나칠 무렵 시야를 멀리하면 우람하게 솟은 산방산에 보이고, 오른편에 그 산방산의 위용에 눌려 길게 엎드린 오름이 보일 것이다.

 바로 단산이라고도 불리는 바굼지 오름이다.

▲ 단산 정상에서 동봉까지의 모습 아쉽게도 전경을 한 장에 담지 못했다.

 옛날 이 섬이 물에 잠겼을 때 바굼지 만큼 남았었다는 전설도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박쥐를 이르는 제주방언인 바구미가 변형되어 바굼지 오름이 되었고, 이 바굼지를 바구니로 알아들은 유식한 분들이 한자화 하면서 단산(簞山 큰 광주리 단)이라고 표기하였다.

 그렇게 이름이 변하여 요즈음은 주로 단산이라고 불린다.

 바굼지오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에 위치하며 대정읍 인성리와 경계를 이룬다.

 표고는 158M 비고는 118M로 높이로만 보면 평균정도의 높이에 불과하나, 본래의 이름이 박쥐를 닮았다는 데에서 보듯 그 형상이 날카로워 쉽게 허락하지는 않는 오름이다.

 오름의 북록은 아예 수직의 낭떠러지이다.

 산방산 옆구리를 서쪽으로 끼고돌아 사계리 마을 윗길로 가면 대정향교라는 푯말이 나오고 이 대정향교 앞에 번듯한 주차장이 만들어져 있다. 진입로도 예전의 농로가 아니라 아스콘으로 포장된 어엿한 도로가 새로 놓였다.

 조선시대 삼군체제(1목 2현) 하에서 이곳은 대정현에 속했는데, 관리가 파견된 모든 고을에는 향교를 설치하라는 국법에 따라 이 대정현에도 향교가 설치되었다.

 초기 대정현성 안에 설치되었던 것이 터가 좋지 못하다는 의견에 따라 두어 차례 옮기다가 1653년(효종4년)에 이곳에 지어지게 되었다.

▲ 대정향교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봉행하던 대성전과 강론과 토론을 하던 지금의 교실에 해당하는 명륜당, 그리고 기숙을 하던 동재와 서재 등이 잘 마련되어 향교의 정형을 잘 갖춘 향교라는 평을 받는 한편 그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한번쯤 꼭 들러볼만한 곳이다.

 동재에는 항상 의문을 가지고 학업에 정진하라는 뜻으로 추사가 써준 의문당 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물론 진품은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지금 걸려있는 것은 모조품이기는 하다.

 경내에는 연륜을 자랑하는 기품 있는 나무들이 서있는데 그 중 잘생긴 소나무는 추사가 그린 세한도의 모델이 아니냐는 설도 있지만 확인할 길은 없다.

 또한 1900년경 신축항쟁(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기 전, 초기 주역이었던 상무회가 조직 되는데 이 상무회의 모임이 열리던 곳이기도 하다.

 훗날 이재수의 난이 영화로 만들어질 때 실제 이곳에서 촬영되기도 하였다.

 향교를 나서 서쪽으로 향하면 새미물이라는 샘이 있는데, 이 향교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이 아침마다 정신을 새롭게 하던 샘이었을 것이다.

 가뭄이 들 때면 성안에서도 이곳에 와서 물을 길어갔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무분별한 지하수 개발 탓에 그 물줄기가 많이 줄었다.

 샘을 지나 서쪽으로 가면 단산사라는 조그마한 절이 나오고 절문 옆으로 등산로가 나있다.

▲ 금산(禁山) 향교의 땔감을 전용하던 오름이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출입을 금한다고 금산이다, 바굼지오름과 남쪽으로 이어져 있다.

 산길로 접어들면 여느 오름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호기심부터 발동한다.

 바다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여 육지로 융기된 다음, 수십만 년의 풍상에 시달린 오름이다. 그리하여 이제 골격만 남은, 사람으로 치면 팔십 노년에 이른 오름인 것이다.

 제주의 오름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오름으로 추정되고 있다.

▲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오름의 이단아라는 말이 절로 실감이 간다. 흙이 별로 없이 화산재와 화산모래가 퇴적된 암릉으로 산세를 이루는데, 이 암릉에도 갖가지 나무들이 빼곡히 자라난다.

 보리수나무가 철지난 열매를 아직도 매달고 있고 보리볼레라고 불렀던 보리밥나무도 많이 눈에 띈다.

 곳자왈 지대에서 흔히 자라는 삼동나무도 많은데 보리밥이나 삼동이나 모두 어릴 적 훌륭한 간식거리였다.

 바윗길을 20여분 걸으니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엔 원탁같이 생긴 바위 하나가 얹어져 있는데 누가 가져다 놓은 듯 한 모습이다. 하지만 이 또한 백만 년의 모진 풍파가 만들어낸 작품이리라.

 남쪽으로는 그나마 비스듬하게 경사를 이루지만 능선의 북쪽은 아예 절벽이다. 혹시나 하는 노파심인지 말뚝을 박고 줄을 메어서 접근을 막아놓았다.

 오름 자체가 여느 오름과는 그 생김새가 확연히 달라서 뭐 굼부리 같은 것은 아예 없고, 서에서 동으로 2Km에 달하는 긴 능선으로 이루어졌는데 남쪽으로 갈빗대 같이 가지를 뻗어 내린 형상이다.

 이 갈빗대 같이 뻗어 내린 능선에서 박쥐가 연상이 된다.

▲ 능선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릉

 능선 동쪽 끝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힘차게 하늘로 솟아있고 그 너머로 산방산이 가소롭다는 듯 이 동봉을 내려 보며 미소를 보내고 있다.

 남쪽으로는 용머리해안에서 송악산으로 해안선이 이어지는데 이 해안선과 형제 섬이 어우러져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오름 자체가 급경사의 오름이다보니 내려다보는 풍광이 마치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듯 한 착각을 일으키는데, 그래서인지 바삐 오가는 차량들마저 한가로워 보인다.

 정상이라고 잠시 쉬고 다시 동쪽으로 향한다.

 산길이 능선길이다 보니 오르내림을 반복하는데 바위투성이라 간혹 네다리로 기어야 하는 구간들도 있다. 간만에 훈련 같은 산행이다.

▲ 오름 동봉. 하늘로 솟아올라서 정상 같아 보이지만 실은 정상보다 8m가 낮다.

 그나마도 허용되는 곳은 다행이고, 삼각형으로 솟아오른 동봉은 장비가 없이는 아예 오를 엄두가 나질 않아 옆으로 우회하기로 한다.

 봉우리 옆구리를 끼고 돌아 전망 좋은 곳에 잠시 쉬는데, 이 오름의 동봉과 산방산 사이로 한라산이 들어온다. 잠시 한라산에 눈인사를 보내고 이내 눈을 들어 깎아지른 동봉의 위용에 감탄을 보낸다.

 이제 하산길이다. 능선과는 다르게 뭇 오름에서 보듯 소나무가 무성한 길이 이어지더니, 마늘이 잘 자란 밭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지고 있었다.

▲ 오름 기슭에 안긴 제주대학교 교수 아카데미. 그리고 그 너머로 대정향교

 서양식으로 지어진 아기자기한 집들이 있어서 보니 제주대학교 교수아카데미란다.

 그러고 보니 이 오름은 조선시대 유생들과 현대의 학자들을 모두 품고 있는 오름이었구나.

 멀리서 보이는 모습은 괴물이 머리를 들고튀어 나가려는 모습인데, 그 모습과 달리 학문의 향기를 품고 있는 오름이었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