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들은 오름에서 태어나고 오름에 의지하여 살아가다가 오름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제주사람들의 삶속에 오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다는 말일 것이다.
자 오늘은 자연 왕릉과 인공의 묘가 어우러진 유택의 도시로 떠나보기로 하자.

▲ 이웃한 돝오름에서 바라본 둔지봉 전경. 오름 한쪽이 무너져 내렸는데,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야외음악당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둔지봉(둔지오름)

 구좌읍 한동리와 덕천리 사이에 위치하는데 지번은 한동리에 속한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 한동리 사람들은 이 오름을 기어이 한동오름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이 오름에 대한 애착이 큰 탓일 것이다.
해발 282M, 비고 160M 정도로 만만치 않은 산세를 자랑한다.
마소가 무리를 지어있는 모습을 '둔짓다'라고 한다. 이 오름에 무수히 많은 알오름이 딸려있는데 그 모습이 마소가 둔진형이라고 둔지오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 외에 다른 해석도 있는데 여기서는 넘어가기로 하자.

 제주시에서 일주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보면 유명한 관광지인 김녕 만장굴 입구를 지나고 동복리를 지나면 구좌읍 한동리가 나온다. 이 마을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여 남쪽으로 8Km를 가면 이 오름의 기슭에 닿게 된다.
제주의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중산간 도로를 따라 구좌읍 덕천리에서 비자림 방면으로 2.8Km를 가도 이 오름의 기슭에 들어설 수 있다.
기왕이면 이 길을 따라가는 것이 중산간지대를 드라이브하는 맛을 더 할 수 있어 좋을 것이다.
오름의 서쪽에 난 농로를 따라 500M 정도를 들어가면 산담이 둘러진 묘들 사이로 폐타이어를 이용한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다.

 오름이 비고도 제법 높은데다가 경사 또한 급하게 이루어져 있다.
지친 다리도 쉬고 목도 축일 겸 잠시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무수한 알오름들이 모여 있다.
아마도 알오름을 잘 모르는 외부인들이 보았다면, 고분군으로 착각할 것이다. 수많은 왕릉이 밀집한.

 오름이 생성될 때 분출한 용암이 공중에서 알갱이 형태로 굳어지면서 떨어져 쌓이게 된다.
이렇게 굳어진 화산암 알갱이들을 제주에서는 송이라고 부르는데, 이 송이가 쌓인 것이 오름인 것이다.
그런데 이 오름은 높다랗게 쌓인 오름의 1/3정도가 화산활동 중 무너져 내리게 된다.
이렇게 무너져 내린 송이(화산쇄설물)들이 덩어리 형태로 미끄러지면서 수많은 알오름들을 만들어 낸 것이다.

▲ 오름 아래로 펼쳐지는 알오름 군락. 그 자체가 오름왕국의 축소판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오름 군락들.

 참으로 장관이다. 올록볼록 한 것이 어떻게 보면 새알을 모아놓은 것 같기도 하다.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이 왕릉 같은 알오름에 인공의 묘들이 또 무수히 조성되어있다. 참으로 묘한 모습들이다.
이 오름 자락이 토질도 단단하고 명당 터로 소문이 난 탓이다.
명절날이나 벌초 때가 되면 때 아니게 장날 같은 풍경을 이루기도 한다.

 제주에서는 돌담도 용도에 따라서 달리 부르는데, 집 울타리를 이루는 돌담은 울담이라하고, 밭의 경계를 이루는 돌담은 밭담, 묘에 둘러놓은 돌담은 산담이라고 한다.

▲ 평범하면서도 전통적인 제주도 묘의 모습. 묘 주변으로 산담을 쌓았다.

 이 섬에서는 묘 주변에 이렇게 산담을 쌓았다.
방목하는 우마에 의해서 묘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도 하고, 화입이라고 해서 해충방재를 위해 봄에 들불을 놓는데, 이 때 화마가 침입하는 것을 막아주기도 한다.

 이 산담을 쌓는데도 나름의 원칙이 있어서, 먼저 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폭이 석자정도는 넘게 넓게 쌓는다.
그러나 높이는 봉분보다 나지막하게 쌓아 이웃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없이 하였다.
또한 혼령이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도 만들어 둔다.
즉 오름으로 돌아간 이들이 다시 마을을 이루어 이웃과 다정히 지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산담 안에는 상석을 놓고 비석을 세운다. 가세에 따라서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세워 놓기도 한다.

 30여분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오르니 정상에 다다른다.
이곳은 예전에 봉수대가 설치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봉수는 해안가 오름을 따라 설치가 되었는데, 오른편의 지미봉과 왼편 묘산봉의 사이가 너무 멀어 삼각형으로 연결하고자 이곳에 설치되었다.
특이한 것은 봉수대의 이름이 오름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의 봉수는 무슨 연유인지 왕가봉수라고 불렀다.
동쪽으로는 지미봉수와 서쪽으로는 묘산봉수와 교신했었다.

 지금의 정상에는 경방초소가 설치되어 있고 산불을 원격으로 감시할 수 있는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다. 그만큼 주변을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 둔지봉에서 바라본 다랑쉬오름의 모습

 북쪽으로 넓은 평야를 지나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동쪽에는 제주 오름의 여왕이라는 다랑쉬오름이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그 너머 성산일출봉이 아련하다.
서쪽으로는 한라산이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장엄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전 사면에는 소나무가 주를 이루고 군데군데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는데, 능선을 따라 띠가 군락을 이루며 자라고 있다.

 일행 중에 한동리가 친정인 분이 있었는데, 어릴 적에는 민둥산에 띠가 가득한 오름이었는데, 시집살이 이십년 만에 찾아오니 소나무가 무성한 오름으로 변했다고 아쉬워한다.
온 산이 벌거벗었던 당시의 사정은 십분 이해가 되면서도 삼나무와 해송을 마구잡이로 심었던 산림녹화 정책에도 아쉬움이 많다.
곡선미가 아름답던 매끄러운 오름에 산림녹화라는 이름의 삽질이 가해졌던 것이다.
원래의 모습을 지키면서 신중하게 추진했어도 좋았을 것을…….
실적만을 중시했던 결과이다.

 올라온 길을 뒤로하고 북록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올라오는 길보다도 경사가 더 심해서 나무계단과 함께 양쪽으로 줄을 매어놓았다. 거기다가 나무가 무성해서 조망까지 가려놓았다.
만약 이곳으로 등산길을 잡는다면 고생깨나 했을 터이다.
이쪽 등산로 입구에 오름표지석이 서있는데 심술궂다는 생각을 해본다.

▲ 구름언덕

 이 오름 북서쪽에 도로와 밭을 하나 건너면 구름언덕이라고 불리는 알오름이 하나 있는데, 그 모습이 여간 평화롭게 보이지 않는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영갑님의 사진으로 태어난 이 구름언덕의 저녁 무렵 모습은 예술 그 자체이다.
오름과 함께 꼭 둘러볼만한 곳이다.

 한라산 너머로 또 하루가 가고 있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