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름 왕국의 여왕.
오름과 여인의 섬 제주에서 이보다 더한 칭호는 없을 것이다.
마치 풍성한 비단치마를 입은 듯 한 모습에서 연유한 칭호이기도 하지만, 비단 그 모습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왕의 칭호를 받을만한 오름이다.

▲ 다랑쉬오름 전경

 등고선을 보면 동심원으로 나타나듯 다음지도에서 스카이뷰를 보면 동그란 오름이다. 이렇게 동그랗게 앉아있는 오름은 보기 드물다.
그러나 우리 시야에서 바라보이는 모습은, 원뿔에서 꼭대기가 사라진 모습으로 제주 오름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 위풍당당함이 마치 오름은 자신처럼 생겨야 된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제주에서 가장 많은 오름을 갖고 있는 구좌읍 송당리 마을에서 중산간도로를 따라 수산리 방면으로 4.6Km를 가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좌회전을 하자마자 왼편으로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보인다. 이 길을 계속 따라 들어가면 이 오름 기슭에 닿게 된다.
또한 송당리에서 세화리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가 '월랑봉 활공장'이라는 표지를 따라가도 이곳에 이르게 된다.
워낙 유명한 오름이다 보니 주차장을 비롯한 편의시설과 오름 안내소 자전거 보관대까지 만들어져 있다.

 찾아가는 길이 구좌읍 송당리를 경유하다보니 송당리에 속한 오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은 구좌읍 세화리에 속한 오름이다.
해발 382m로 구좌읍에서 높은오름 다음으로 높고 비고가 227m에 달하여 단숨에 오르기에는 벅찬 오름이다.
이런 오름에 등산로를 직선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그 원성이 없을 수 없었다.
이제는 기존의 등산로를 기반으로 하여 弓자 형태로 만들어 놓았다.
어쩌면 고육책이었겠으나 이 또한 자연스러운 멋과는 거리가 있어 오르내리는 탐방객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고어 높다는 뜻의 '달'과 봉우리를 뜻하는 '수리'가 만나서 '달수리'오름인 것이 변형되면서 다랑쉬가 되었다는 것이 학술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송당 마을에서 보면 이 오름의 굼부리 위로 달이 떠오르는데, 이 모습이 마치 오름이 달을 알로 낳는 것 같다고 해서 '달알'에서 유래되었다는 해석도 있다. 어느 것이 옳든, 송당 마을 사람들은 이 오름에서 떠오르는 달의 모습을 큰 자랑으로 여긴다.

 원래는 키가 작은 국수나무나 소사나무, 그리고 띠와 억새가 어우러진 매끈한 오름이었으나 산림녹화사업의 와중에 삼나무와 편백나무들이 식재되어 아랫자락으로는 식재된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다.

삼나무 숲 아래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이내 숲은 사라지고 하늘이 드러난다. 그리곤 폐타이어를 이용한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경사가 큰 탓인지 등산로 양 옆으로 말뚝을 박고 줄을 쳐놓았다.
가뜩이나 등산로의 형태에서 인공의 냄새가 풀풀 나는데 양쪽으로 줄까지 쳐놓으니 어디에 갇힌 듯, 자유를 박탈당하고 통제되는 느낌이 영 맘에 거슬린다.

 삼십 여분을 땀을 훔치며 올라가니 능선에 다다른다.
거대한 굼부리가 위용을 드러내는데 여느 오름의 굼부리에 비길 바가 아니다.
깊이가 무려 115m. 오름 높이의 절반 넘게 파인 것이다. 한라산 백록담과 같은 깊이 이다.
참고로 가장 깊은 굼부리는 산굼부리 분화구로 깊이가 132m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이 오름 굼부리이다. 내려다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듯 한 느낌이 든다.

▲ 정상에서 내려다본 굼부리의 위용. 한라산 백록담과 같은 깊이를 갖는다. 굼부리 안에 돌담이 둘러있는데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다.

 옛날 설문대 할망이 이 섬을 창조할 때 흙을 한 움큼씩 집어다가 오름을 만들었는데, 이 오름을 만들고 보니 너무 도드라지게 생겨서 주먹으로 한 대 내려친 것이 이 굼부리가 되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추석에 이 오름으로 달맞이 산행을 온 적이 있었다.
지금은 굼부리로 내려가자 말라고 푯말을 붙여놓았는데, 당시만 해도 무시로 내려가던 때이어서 달을 맞으러 굼부리로 내려갔다.
월출을 볼 요량이라면 당연히 정상으로 향해야 하지만 색다른 모습의 달을 맞이하러 내려갔던 것이다.
굼부리 안에서 보면 하늘이 능선을 따라 동그랗게 보이는데 그 동그란 하늘로 보름달이 들어와서 그 경관이 사뭇 경건하고도 황홀하였다.

 겨울날씨인데도 힘들게 올라온 탓에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뒤를 돌아보니 앙증맞은 오름 하나가 딸려있다.
혹자는 UFO를 닮았다고 하고 또 누구는 계란반숙을 닮았다고도 하는 아끈다랑쉬오름이다.
아끈.
표준어에 '아'라는 접두사가 있다. 아열대. 아고산대. 아황산 등으로 쓰이는 뭐에 버금가는, 조금 못 미치는 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이 '아'를 제주에서는 '아끈' 이라고 한다.
그래서 아끈다랑쉬오름은 다랑쉬에 버금가는 오름이라는 뜻이 된다.
매끄럽고 둥그런 어떻게 보면 귀여운 느낌까지 드는 오름이다. 매끄러운 풀밭인데 한두 그루 서있는 나무가 인상적이다.

▲ 아끈다랑쉬오름

 다시 능선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한다. 오름이 크다보니 능선에 올라서고도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웬만한 오름 하나는 올라가는 정도이다. 십여 분을 걸어 정상에 섰다.
정상에서 굼부리를 내려다보니 백록담과 같은 깊이라는 것이 실감이 간다.

 굼부리 중앙에는 둥그렇게 돌담이 둘러져 있는데, 농사를 지었던 흔적이다.
이 높은 곳을 오르내리며 땅을 일구었던 팍팍했던 삶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프다.
이 오름 옆에 이 오름을 의지하고 마을이 하나 있었다.
다랑쉬 마을이라고 불렀다. 4.3사건의 여파로 그해 11월에 전소되고 없어져버린 마을이다. 마을이 없어지면서 이곳의 농사도 작폐되었을 것이다.
다랑쉬굴이라고 불리는 굴에서는 4.3사건 때 희생된 11구의 시신이 발굴 되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여성과 어린이의 시신은 물론, 발굴된 유품들도 군사무기가 아니라 생활용품들이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해주었다.
그나마 일정부분 민주화가 진행되던 1992년에 발견이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오름 정상에, 여느 오름에서는 볼 수 없는 기다란 침목을 세줄 깔아놓았는데 용도가 짐작이 안 된다. 우리는 이곳을 단체사진 찍는 용도로 쓰기로 했다.

 구름에 쌓여 한라산의 모습은 보이지 않으나 동쪽으로 이어지는 오름들은 선명하다.
윤드리오름 왕메 물메 성산 그리고 그 너머엔 섬 속의 섬이라는 우도가 누워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그 이름만으로도 아름다운 용눈이오름과 손지오름이 이웃해있다.

▲ 실패한 개발의 흔적

 능선을 따라 동그랗게 등산로가 마련되어 있는데 그 길이가 무려 1.5Km에 달한다.
능선을 따라 도는데 방향마다 새로운 모습들이 나타난다.
무슨 펜션을 짓다말았는지 이글루 같이 생긴 집들이 폐허로 널려있기도 하고, 얼핏 보면 UFO가 앉았던 흔적 같은 곳도 보이는데, 실패한 개발의 흔적들이다.
하지만 또 다른 곳으로는 자연 상태의 곶자왈들이 이어지고, 마치 모자이크조각들을 맞추어놓은 듯, 밭담을 경계로 농경지들이 조각조각 붙어있다.
한겨울임에도 싱싱한 야채들이 푸름을 잃지 않고 있다.
겨울에도 푸름을 볼 수 있는 곳.
푸르고 싱싱한 야채를 얻을 수 있는 곳.
나는 이 땅이 좋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