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이 지났으나 아직도 봄은 요원한 가, 하늘은 맑고 화창하지만 바람은 싸늘하고 땅엔 엊그제 내린 눈이 희끗희끗 남아있다.

 우리 조상들의 계절 구분법에 따르면, 동지에서 춘분까지가 겨울, 춘분에서 하지까지가 봄, 하지에서 추분까지는 가을, 추분에서 동지까지를 가을이라고 했으니, 말이 입춘이지 아직도 겨울의 한복판이다.

 그래도 화창한 하늘을 믿고 차를 탁 트인 번영로에 얹고 달리다가, 대천동 사거리에 이르러 송당리 방면으로 좌회전해서 2Km 남짓, 송당목장 입구에 다다랐다. 여기서 왼편, 큰 물탱크가 설치된 옆으로 포장과 비포장이 반복되며 이어지는 농로를 따라 2.2Km를 가면 왼편에 아담하고 운치 있는 연못에 다다른다.
이른바 '몰 쉬운 못'(말을 쉬게 하는 연못)이다.

 그리고 좌우로 오름이 서있는데 오른편에 보이는 오름이 체오름이고, 왼편에 있는 오름이 오늘 우리가 찾는 거친오름이다.

 본디 이 마을 송당리가 가장 많은 25개의 오름을 갖고 있는데, 예까지 오는 길도 오름과 오름이 이어지는 길이다.

▲ 체오름에서 바라본 거친오름 전경. 앞쪽의 원형 굼부리를 갖는 오름과 뒤쪽의 원추형 봉우리 두 개로 이루어진 오름이다. 오름 앞쪽 기슭에 자그마하게 보이는 곳이 몰 쉬운 못이다.멀리 하얀 눈을 덮고 있는 곳은 한라산이다.

 거친오름

 구좌읍 송당리와 덕천리의 경계를 이루는 오름이다.
해발은 약 355m이고 70m정도의 비고를 갖는 오름이다.
여느 오름과 색다른 점은, 원형 굼부리를 갖는 오름과 원추형의 오름,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복합형 오름이다.

 거친오름이라고 하면 오름이 형상이 거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 않다.
거친오름이란 거쳐지나간 오름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면 참 특이한데, 오름 옆에 있는 '몰 쉬운 못'을 보면 이해가된다.

 예전 제주목과 정의현을 오가는 사람들이 주로 말을 타고 다니는데, 요즘 도로의 주유소에 들러서 차에 기름을 넣어야 되듯이, 말도 중간에 물도 먹이고 쉬어 줘야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부근을 지나갈 때면 반드시 이곳을 거쳐 지나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거친오름이다.
물론 한자로 표기하면서 거칠황(荒)을 써서 荒岳이라고 표기된 경우도 없지 않으나, 한자의 경우에도 이두식으로 巨親岳 또는 巨體岳으로 기록되곤 했다.

 그만큼 이 연못은 지나는 길손들이나 방목하는 우마, 그리고 야생에 살아가는 뭇 짐승들에게는 소중한 생명수였던 것이다.

▲ '몰 쉬운 못'뭇 생명의 원천이었던 연못이다. 오늘은 날이 추워서 얼음에 덮여있다.

 지금은 삼다수가 제주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의 하나이고, 나 또한 육지의 벗들에게 "우리는 삼다수로 세차 한다"라고 염장을 지르곤 하지만,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려 70년대 초반으로 가면 사정은 정반대였다.

 지하수가 풍부하다는 말은 뒤집으면 지표수가 적다는 뜻도 된다.
그래서 이 섬의 사람들은 용천수가 솟아나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또 물이 생존에 필수 조건이긴 하지만 물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법이어서, 농지가 넓은 곳에 마을을 이루고 살아가는 경우에는 마을에서 공동으로 연못을 만들고 관리 했다.

 인공의 연못을 만드는 경우, 주로 세 개의 연못을 만드는데, 이른바 '먹는 물통'(식수용 연못), '쇠 멕이는 물통'(소 먹이는 연못), '서답하는 물통'(빨래하는 연못)등이다.

 그중에서도 '먹는 물통'은 특별한 관리대상이어서, 어릴 적 이 근처에서 놀다가 어른들에게 야단을 맞곤 했었다.
이 연못에서 아침저녁이면 여인들이 물허벅을 지고 이곳에서 물을 길어다가 식수로 쓰곤 했던 것이다.

 아직도 마르지 않는 이 소중한 연못이, 지금은 지나가는 철새들이나 이용할 뿐 아무도 돌보지 않는 곳으로 쇠락했다.

 목장의 경계를 뜻하는 철조망을 넘어 오름으로 들어서니 삼나무가 무성하다. 본디 풀밭 오름이었을 터인데 산림녹화의 구호를 따라 "산에 산에 산에다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그다지 비고가 높지 않아 15분정도 잔설을 밟으며 오르니 이내 정상에 다다른다.
야트막한 원형 굼부리가 펼쳐지고 그 안에는 키 작은 잡목이 무성한데, 그 가운데 나무 세 그루가 도드라진 모습으로 서있다.
마치 아프리카의 초원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나무 그늘 밑에서 잘생긴 숫사자 한 마리가 낮잠이라도 즐기고 있을 듯한 그런 분위기이다.

▲ 굼부리의 모습.워낙 야트막해서 굼부리로서의 운치는 없으나 마치 초원을 보는 듯하다.

 조그만 표지판이 하나 있어서 다가가보니 상수리나무를 식재했다고 적어 놓았는데, 상수리나무는 다 죽어버린 것인지 아니면 엉뚱한 곳에 표지판을 세운 것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심어놓았다는 상수리나무는 어디에도 없다.
서쪽 능선엔 분묘가 하나 있는데 후손들이 이장을 했는지 파헤쳐진 모습이 흉하게 남아있다.

 능선을 한바퀴 돌고 남쪽 봉우리에 올랐다.
목장의 초지 건너 유명한 거문오름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한라산의 장엄하게 솟았다.
북쪽 길 건너에는 체오름이 펑퍼짐하게 앉아있는데, 앞에서 바라보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게 둥그런 모습이다.
오름 주변 목장의 초지엔, 트랙터를 이용해서 목초를 베어냈는지 회오리 문양이 선명하다.

 올라왔던 길을 따라 다시 내려간다.

 평지라고는 별로 없이 수많은 오름이 즐비한 이곳, 그 오름과 오름 사이에서 땅을 일구어 양식을 얻고, 소와 말을 키워 생계를 이어왔던 모든 이들의 삶이 존경스럽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