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다리는 것은 더디게 오는 법인가.
봄은 참 더디게도 온다.
며칠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이내 찬바람이 심술을 부리고 있다.
그래서 이번 주말 산행은 더디 오는 봄을 마냥 기다리기보다 마중을 나서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봄이 찾아오는 제주도하고도 남쪽나라 서귀포시 남원읍에 있는 오름으로.

▲ 이승이오름 전경

 이승이오름(이승악)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위치한 오름이다.
말이 신례리이지 마을과는 한참 떨어져 있고, 외려 한라산 국립공원구역과 인접해 있을 만큼 깊숙이 자리한 오름이다.
그런 만큼 해발고도도 높아서 539m, 비고는 114m으로 평균정도의 오르막을 가지고 있는 오름이다.

 깊숙하고 자연림이 우거진 지역이다 보니 식(살쾡이의 제주어)이 살았다고 하여, 또는 오름이 모습이 식을 닮았다고 하여 이식이오름이었는데, 점차 변하여 이승이오름으로 불린다는 해석이다.
하지만 썩 와 닫지는 않는 해석이기도 하다.

 오름의 이름이라는 것이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듯 명확히 기록해두는 것이 아니다.
마치 작자미상의 구전소설이 그 시대 민중들의 공감을 얻으며 전해지고 또 시대상에 따라 조금씩 윤색되어 가듯이, 오름의 이름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조금씩 변형되어 전해지기 때문에 그 이름의 연원을 정확히 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이름의 연원을 찾아보는 것은 옛 선인들이 오름에 대해 느꼈던 느낌에 공감해보려는 것이고, 또한 그 연원을 알고 오름을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지고 새삼 감탄스러운 이름들이 많기 때문이다.

 서성로가 개설되기 전에는 주로 5.16도로 논고교 주변에서 이 오름으로 진입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 길이 한라산 국립공원구역에 속하기도 하고, 또 한동안 작폐했던 표고 밭이 다시 생겨 다니기가 성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뭐 어떠랴 더 멋있는 길이 준비되어 있은데.

▲ 오름에 이르는 길이 걷고 싶을 만큼 예쁘게 마련되어 있다.

 제주도를 남북으로 잇는 5.16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가다가 수악교를 지나면 왼편으로 서성로라는 신작로를 만난다.
이 서성로를 따라 동쪽으로 3Km 남짓을 가면 오른편으로 이승악 탐방로라는 간판과 함께 번듯한 주차장이 나온다. 이 오름의 목장길 입구이다.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되 서성로가 개설되기 이전, 찾아가기도 힘들었던 시절에도 이 오름 자락에는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었고, 또 오름 자락 한편에는 나무들을 모두 베어내고 주변과는 전혀 다른 수종으로 식재되어 있기도 했다.
또 그 시절에는 보기 드물게 오름에 산책로를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아마도 누군가 개발을 하려고 했다가 어떤 연유로 실패한 흔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뒤, 근자에 이르러 마을에서 오름에 이르는 산책로를 아주 번듯하게 만들어 놓았다.
목장 길을 따라 오름에 이르는 길뿐이 아니라 신례천의 계곡을 끼고 찾아가는 길, 그리고 오름의 산책로도 다양하게 개설하여 놓았고, 정상에는 정자도 짓고 조망도 확보하여 놓았다.
마을사람들의 정성을 따라 목장 길로 가기로 하였다.

 목장에 이르는 농로를 따라 한편에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바닥에는 제주산 송이도 깔고, 또 구간에 따라서는 천연소재의 매트로 깔아놓았다.
관리가 어려웠는지 문을 닫아놓았지만 곤충들의 생태를 볼 수 있는 곳도 만들어 두었다.

 길을 따라 30여분 남짓, 오름의 입구에 다다른다.
사실 예까지는 차를 이용할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왕 걷자고 나선 걸음이고 마을 사람들의 정성을 생각하면 아니 걸을 수가 없다.
오름에 대한 간단한 안내표지가 있고, 오른편 길을 따라 가면 오름으로 오르는 산책로를 만난다.

 말굽형의 굼부리를 갖는 오름인데 온통 자연림이 무성해서 그 모습을 온전히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내심 초봄의 야생화를 기대하였는데 아직 때가 이른 것인지 내 관찰력이 문제인지 아쉽게도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찾아볼 것이라고 열심히 땅만 보고 걷기를 20여분, 정상에 다다랐다.

▲ 정상에서 바라본 모습. 멀리 보이는 오름이 사려니오름이다. 까마귀한마리가 렌즈로 들어왔다.

 원래는 정상에도 나무가 가득해서 조망이 없었는데, 일부 나무를 잘라서 굼부리쪽으로 조망권을 확보해놓았다.
눈앞으로 우거진 산림이 펼쳐지고, 그 뒤로는 요즘 유명한 사려니오름이 보인다. 이웃한 오름 넙거리와 함께.

 오름 정상부의 형태가 'ㅅ'자 모양으로 되어있어 북동쪽으로 뻗은 봉우리가 있는데, 이곳엔 몇 개의 기암들이 있고 이 기암 위로 나무가 자라는 특이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바위위에 나무가 자라는 이런 모습은 아마도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일 것이다.

 오름의 양편으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오름이 양쪽에 계곡을 끼고 있는 모습은 보기드믄 경우이다.
동쪽의 계곡은 종남천의 상류로 가고, 서쪽을 끼고 남쪽으로 향하는 계곡은, 신례리와 하례리를 거처 공천포로 가는 신례천 또는 쇠기내라고 부르는 계곡이다.

 서쪽 나무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두 갈래의 길을 만나는데, 오른편으로 돌면 오름이 아랫자락을 따라 도는 둘레길이고 계속 따라가면 다시 목장 길에 이른다.
또한 왼편으로 계곡을 따라 돌면 신례천을 따라가는 산책로를 만난다.

▲ 군데 군데 나그네들을 위한 오름 안내도를 세워 놓았다.

 오면서 걸은 길을 다시 걷기는 밋밋해서 왼편으로 돌았다.
오름 자락을 따라 가던 길이 다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오른편 길이 신례천 쇠기내를 따라가는 길이다.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을 건너니 숲길이 이어지는데 여간 아름답지 않다.
한여름 무더위에 걸어도 좋을듯하다.
걷는 길 중간 중간 상잣성이며 중잣성이며 화생이궤며, 등등의 안내표지를 세워놓아 찾는 이들의 호기심에 답하고 있다.
천천히 즐기며 걸으면 한 시간정도의 길지 않은 숲길이다.

 가슴가득 숲의 기운을 빨아들여 심호흡을 해본다.
초봄의 숲 향기가 폐부를 거쳐 온몸으로 퍼져간다.

 크지 않은 오름 하나에 이렇게 다양한 길과, 다양한 체험의 기회를 만들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