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을 구분 짓는 입춘이 지났지만 아직도 바람에는 겨울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래도 하늘은 맑고 화창한 것이 계절의 변화는 동장군도 어쩌지 못하는가 보다.
이 계절 초봄.
계절의 변화를 가장 먼저 알리는 이들이 있어, 이들을 찾아, 이들이 많은 오름으로 나서기로 한다.

▲ 괴수치오름에서 바라본 왕이메오름. 철탑이 눈에 거슬리지만 뭐 할수 없고, 저 안에 거대한 굼부리가 숨겨져 있다.

 왕이메오름

 이 섬의 천년왕국 탐라의 삼신왕이 사흘 동안 기도를 올렸다는 오름이다.
한자로는 왕이 찾았었다고 해서 王臨岳, 王伊岳, 王岳등으로 불리고, 그 형상이 소가 누워있는 모습이라고 해서 臥牛岳이라고 불리는 경우도 있다.
한림읍과 안덕면의 경계에 있는데 지번은 안덕면 광평리에 속한다.
해발 612m로 제법 높은 지대에 위치한 오름에 속하고, 비고는 92m로 그다지 높지 않은 오름이다.
그런데 이렇게 별로 높지 않으면서 오름의 이름에 왕을 붙이는 것은 바로 베리창 또는 암메창이라고 부르는 굼부리 때문이다.
두 개의 원형 굼부리를 갖는 오름인데 큰 굼부리의 경우 깊이가 100m를 넘어 비고보다 깊다. 즉 오름에 올라가는 높이보다 분화구로 내려가는 깊이가 더 깊다는 뜻이다.
또한 그 크기가 자못 웅장하여 이 지역사람들은 동부지역에 있는 산굼부리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한다.
단연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분화구를 갖는 오름인 것이다.

▲ 오름 입구에 서있는 안내표지판

 평화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새별오름을 지나면 바로 솔도 마을로 가는 도로표지가 나오는데, 이 길을 따라 좌회전하면 새로 개설된 아덴힐 골프장이 나온다.
이 골프장을 지나 3~400m를 더 가면 오른편 오름 입구에 안내판이 서있다.
요즘 한 단체 한 오름 가꾸기 운동을 하는데, 이 오름은 어느 단체가 가꾸기로 했는지 지도를 만들어서 이곳 저곳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 박새. 새우란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녀석은 박새라는 친구다.

 오름 사면을 따라 올라가는데 나무들은 아직 겨울옷 그대로인데, 바닥엔 박새들이 새순을 힘차게 밀어올리고 있다.
십여 분을 오르니 능선 길에 다다른다. 길은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둥그렇게 나있다.
능선에서 왼편 길을 따라 정상으로 향하는데 누군가 감탄사를 외친다.
돌아보니 분홍노루귀가 땅위에 살며시 고개를 들고 있다.
야생화가 많은 오름인데, 주로 따듯한 굼부리 안쪽에 많이 서식한다.
이 녀석은 아무래도 엄마 말을 안 듣고 이곳으로 나와 고생중인가 보다.

▲ 분홍노루귀

 능선 길도 온통 숲길인데 이 길을 십여 분 더 가니 하늘이 환하게 드러나는 정상이다.
바로 발아래로 펼쳐지는 거대한 분화구가 일행들을 압도한다.
과연 탐라의 왕이 삼일이 아니라 삼일씩 백번이라도 찾을 법하다.
천년의 왕국을 이었으니 대충 계산에도 60여명의 왕이 있었을 터이니 백번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멀리 동쪽으로 보이는 한라산에는 아직도 흰 눈이 가득하다.
굼부리 너머 서쪽으로는 산방산이 머리만 아스라이 보이고 송악산에서 차귀도로 이어지는 해안선이 아득하다.
길 건너 이웃에 북돌아진오름이 서있는데 이름대로 두 개의 북을 매달고 있다.
이곳에서 보면 그 재미있는 이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 진다.

▲ 정상에 서면 한라산이 아스라이 보이는데 아직도 하얀 눈을 덮고 있다.

 잠시 주변의 풍광에 시선을 팔다가 다시 길을 재촉한다.
이제 서쪽으로 도는 능선길이 꽃밭이다.
소담스런 새끼노루귀들은 아직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섰는데, 봄의 전령사라는 노란 복수초들이 화원을 이루고 있다.
드물게 변산바람꽃들도 존재를 알리고 있다.
새우란도 가끔 보이는데 이 녀석들은 아직도 게으름을 피우느라 잎사귀를 땅에 늘어뜨린 채 축 처져있다. 

▲ 새끼노루귀 수줍어서 고개를 다 들지 못하고 있다.

▲ 복수초. 행복과 장수를 가져다주는 꽃이라고 한다.이 친구는 만개했을 때 보다 요만큼일 때가 아름답다.

▲ 변산바람꽃

검단진일보(檢斷進一步)라는 말이 있다. 칼이 짧으면 한걸음 나아가라는 뜻일 것이다.
키가 작은 야생화들은 주위의 풀들이 자라서 키를 넘겨버리면 꽃을 피우더라도 사랑의 메신저 벌이나 나비의 주목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남보다 일찍 꽃을 피우는 것이 생존 전략이 된다.
자신의 핸디캡을 부지런함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축구선수로 말하면 박지성선수 같이.

 굼부리가 깊이 못지않게 넓이도 넓어서 능선 길을 걷는 맛이 그 어느 오름보다 호젓하다.

 사각으로 밧줄을 쳐 놓은 곳이 있어서 다가가니 인공으로 만들어진 수직 동굴이 패여 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개나.
일제 강점기 일본군들이 이 섬사람들의 생명을 볼모로 옥쇄작전을 준비할 때 만들어 놓은 것들이다.
엄밀히 말하면 일본군들이 이곳 백성들을 동원해서 매질을 해가며 만들어 놓은 것들이다.
어떤 목적으로 만들었는지 사다리가 없이는 들어갈 수도 없게 수직으로 파놓았다.

 굼부리로 내려섰다.
주변으로는 돌아가며 병풍이 둘렸고 위로만 뚫려 하늘이 드러나는데 오늘따라 하늘색이 유난히도 파랗다.
마치 인간의 세계가 아닌, 인간세계와는 다른 세상에 와있는 느낌이다.
가히 선계라고 할 만한 곳이다.

▲ 굼부리 능선너머 하늘이 참 파랗다.

 의관을 갖추고 이곳에서 제사를 올리던 탐라의 왕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책임이 따르는 자리였으니 빌어야 될 소원도 많았으리라.

 글자 그대로 오름에 파묻힌 느낌이다.
거대한 오름 속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재촉한다.
오름 서녘으로 두 개의 오름, 괴수치오름과 돔박이오름이 이어지는데 함께 둘러보는 것도 괜찮은 여정이 된다.

▲ 오름의 남녘. 녹색의 싱그러움.

 오름의 남쪽으로 돌아 나왔는데 진초록의 싱그러운 초지가 우리 가슴까지 싱그럽게 한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