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유독 봄이 늦게 찾아오는 느낌이다.
요즈음 회자되는 '사찰'이라는 단어가 주는 으스스한 감정 때문만이 아니라 실제 느끼는 기온도 그렇다.

 하지만 조금 더디 왔을 뿐. 매주 산행을 위해서 모이는 주차장에는 차를 세울 틈이 없다.
제주 왕벚꽃 축제를 찾는 인파가 늦게 온 봄이 더욱 반가웠는지 예년의 배를 넘는 듯하다.

▲ 거슨새미오름에서 바라본 민오름. 민둥산이어서 민오름이라고 불리다는데 지금은 온통 식재된 나무로 가득하다. 뒤에 살짝 보이는 곳은 비치미오름이다.

 민오름

 제주에는 민오름으로 불리는 오름이 다섯 군데나 있다.
대체로 민둥산이서 붙여진 이름이고 봉개동의 민오름의 경우 무녀가 쓰는 고깔을 닮았다고 무네오름이었는데, 이게 변형이 되면서 민오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아무튼 오늘 우리가 찾아갈 곳은 민둥산이어서 민오름이다.
그중에서도 구좌읍 송당리에 위치한 송당 민오름.

 지금은 제주도내의 교통이 발달해서 제주시에서 어디를 가더라도 한 시간이면 찾아갈 수 있고, 또 제주도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더라도 두 시간 안쪽에 도착할 수 있으니, 같은 이름의 오름인 경우, 꼭 지역의 이름을 붙여서 어디어디 민오름 이렇게 해줘야 하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방 백리 안에서 삶을 영위하던 과거의 경우에는 별다른 불편 없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번영로변 대천동 사거리에서 송당리 방면으로 2.3Km를 가면 오른편에 송당목장 입구가 나온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800m 정도를 가면 왼편으로 귀빈사 입구가 나오고 이내 오름길로 이어진다.
해발 362m, 비고 102m. 즉 해발 260m의 초원에, 높이 102m의 오름이 있다는 뜻이다.

▲ 삼나무 길

 목장의 입구부터가 범상치 않은 곳이다.
보통의 목장은 철문에 간판하나 달려있는 정도이지만, 이곳의 입구에는 삼각형의 화단을 조성해서 격을 높여 놓았다.
목장입구로 들어서면 곧게 뻗은 길 양옆으로 삼나무가 마치 사열을 하듯 서있는데,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삼나무 숲길에 해당할 것이다.
진초록의 초지와 삼나무의 안내를 따라 10여 분 걸어가니 왼편으로 철문이 나온다.

 귀빈사라고 불리는 별장이다. 이승만 정권말기 이 목장의 건설과 함께 지어진 건물이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호화롭기 이를 데 없는 건물일 것이다.
지금 둘러보아도 양변기 싱크대, 증기식 보일러까지 갖추어져 있다.

 미국식 삶에 익숙했던 그는 이 서양식 별장에서 흔들의자에 노구를 의탁한 채 눈을 감고 여유를 즐기고자 했을까.
사실 두 번밖에 이곳을 찾지 못했다고 한다.
삼년이 채 못 되어 4.19혁명이 나면서 권좌에서 쫓겨나야 했기 때문에... 권력과 함께 건물을 쇠락해갔으나, 동백나무 느티나무 그리고 대나무 등으로 가꾸어진 정원은 여전히 아름답다.

▲ 귀빈사

 별장정원 옆으로 등산로가 나 있는데 이곳은 아직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아 옛길이 그대로이다.
이름이 민둥산을 뜻하는 민오름이지 지금은 식재된 삼나무와 소나무 그리고 여러 가지 잡목들이 어우러져 있다. 꽤 가파른 오르막을 20여 분 오르니 능선에 다다른다.
그리 깊지 않은 야트막한 원형 굼부리를 갖는 오름인데, 굼부리의 한쪽이 함몰되고 오랜 세월 빗물에 침식되어 계곡처럼 되었다.
평평한 능선 길을 돌아 남쪽으로 가면, 높이 차이는 별로 없어도 여기가 정상이다.

 4월의 따스한 햇살이 포근히 오름을 감싸고 발아래 야생화들은 그 햇살을 빨아드리느라고 여념이 없다.
잡목 속에는 현호색이 수줍게 숨어있고, 양지바른 곳에는 양지꽃이 노란색의 꽃잎을 펼치고 있다.

▲ 현호색과 복수초가 서로의 아름다움을 견주고 있다.

 또 산자고 역시 꽃잎을 활짝 펴고 있다. 이 녀석은 햇살이 없을 때에는 아예 꽃잎을 닫아 얼굴도 안보여주는 깍쟁이 인데, 오늘은 아주 활짝 펴고 있다.
보라색의 제비꽃, 그리고 흰색의 남산제비꽃도 어김없이 눈에 띈다.
남쪽 목장너머에는 비치미오름이 여차하면 날아오를 준비를 하는 듯하고, 북쪽으로는 거슨새미오름이 육중하게 버티고 있다.
오름 주변으로는 온통 목장지인데 바로 유명한 송당목장이다.

 송당목장.
700여 년 전, 이 섬에 왔던 몽고인들의 눈에는 이 섬은 말을 키우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여 목마장으로 활용하였는데,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 섬에 왔던 미국인의 눈에는 소를 키우기에 적합한 곳으로 보였나 보다. 그들은 카우보이가 아니던가.

 한국전쟁당시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장군이 한미재단 고문을 맡고 있었는데, 그의 권유에 따라 이곳에 목장을 건설하게 된다.
1957년 5월 기공식에 참석차 제주를 찾은 이승만대통령은 관덕정에서 열린 도민환영대회에서, 당시 피죽으로 겨우 연명하던 백성들을 모아놓고 "우리 국민들도 이제 쇠고기를 먹어야 됩네다"라고 하여 이 말이 한때 인구에 회자되기도 하였다.

 1957년 10월 1차로 목장울타리를 두르고 축사와 관리동 또 대통령을 위한 귀빈사, 기타 부대시설 공사를 마치고 국립제주목장으로 완공하였다.
그리고 밴플리트장군의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에서 미국소(브리만 종)160여 마리를 들여오게 된다.

 이렇게 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목장으로 기세 좋게 출발하였는데, 상황은 그리 녹녹치 못했다.
이 땅에 없던 브루셀라병이 번져 한바탕 홍역을 치러야 했고, 또 아직은 낙후된 축산 기술과, 소 한 마리를 파는데도 경무대의 허가를 득해야 하는 관료주의의 경직성으로 인해 목장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 문제는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는 등 골칫거리가 되었다.
5.16쿠데타 이후 박정희의장은 개선대책을 보고받는 자리에서 보고서를 내던지며 "이 따위로 해서 현상유지나 할 거면 집어치워"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그리고 목장의 운명은 민영화의 길을 걷게 된다.

▲ 송당목장의 푸르른 초지

 되돌아 나오는 길.
목장의 히스토리나 운명이야 어쨌든 푸르른 초지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이제는 소들도 한우로 바뀌었고 또 말들도 함께 지내고 있다.

 노루 한 가족이 소들과 어울려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경계와 소유를 뜻하는 철조망이 처지고, 종이쪼가리의 소유문서가 인간들 사이엔 통용되지만, 그것은 인간들 사이의 문제일 뿐, 자연은 이렇게 너나없이 어울려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오늘 쏟아져 내리는 이 따스한 햇살에 주인이 어디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