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기 원나라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시기에 수많은 여자들이 공녀(貢女)라는 이름으로 원나라로 끌려갔었는데, 그중에 기氏라는 14세의 소녀가 있었다.

 이 어린소녀에게 무슨 망국의 책임이 있었을 것이며, 아니면 나라의 은혜를 입은 어떤 부채라도 있었을 것인가.
오로지 죄라면 망국의 백성이라는 것 밖에.

 하지만 여기에서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의 눈에 들어 제2황후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아들을 잉태하기위해 고심하던 중 어떤 도인이 나타나 "북두칠성의 명맥이 비치는 동쪽바닷가의 삼첩칠봉을 찾아 기도하면 아들을 얻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찾아낸 곳이 바로 이곳.

 이곳에 원당사라는 절을 세우고 5층 석탑을 세워 그녀를 위해 기도를 하도록 하였다.
그리곤 소원대로 그녀는 아들을 얻었고, 그 아들을 황태자로 봉한 뒤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갖은 권세를 누렸다.
본인뿐만이 아니라 그의 오빠인 기철 역시 기황후의 권세를 등에 업고 고려 조정을 농락하게 된다.

▲ 진드르에서 바라본 원당봉

 그 삼첩칠봉(三疊七峰)의 오름, 세 개의 능선에 일곱 개의 봉우리를 갖는 오름, 원당봉을 찾아가기로 한다.

 원당봉

 앞의 전설과도 같이 원나라의 절인 원당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외에도 원당오름, 마을 이름을 붙여서 삼양오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바닷가에 위치한 탓에 해발고도는 171m에 불과하나 비고는 120m로 오름의 평균을 조금 넘는다.
제주시 삼양동과 조천읍의 경계에 위치하며, 특이하게도 말굽형 굼부리에 산정화구호를 갖는 오름이다.

 제주시 삼양동, 삼양초등학교 옆에 있는 삼양오거리에서 북동쪽으로 비스듬히 난 길을 따라 1Km을 가면 오른편으로 여러 개의 사찰입구 표지가 모여 있는 곳을 만나게 된다.
이 표지를 따라 올라가면 먼저 불탑사와 원당사 입구, 그리고 새로 개설한 트래킹코스 입구, 마지막으로 굼부리 안에 위치한 문강사를 차례로 만나게 된다.
그러고 보면 오름에 세 개의 사찰이 함께 존재하는 오름은 아마 이곳이 유일할 것이다.

▲ 오름입구의 안내판들. 제주의 오름에 이런 곳은 여기밖에 없다.

 먼저 새로 만들어 놓은 트랭킹코스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새로 생긴 길답게 친환경 매트를 깔아 정비해 놓았는데, 소나무와 잡목들 사이로 이어지는 길이다.
도심에서 멀지않은 오름임에도 불구하고 장끼 한마리가 우리 일행을 보고는 얼른 숲속으로 꽁무니를 뺀다. 그러고 보니 지금이 이 녀석들에겐 사랑의 계절인가보다.

 숲길의 답답함을 보상이라도 하듯 자그마한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어 제주시의 동부지역을 모두 조망할 수 있다.
아래로 삼양동과 화북동 그리고 제주항, 그리고 멀리로는 별도봉과 사라봉이 겹쳐서 보인다.

▲ 전망대

 길은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대략 8부 능선을 따라 1.3Km의 산책로가 동그랗게 나있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다시 시멘트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문강사라는 절을 품고 있는 굼부리가 나오는데, 그 입구 양옆으로 등산로가 나있다.
정상을 끼고 굼부리 능선을 한 바퀴 도는 길이다.

 오른편 길을 따라 5 분여, 정상에는 시비가 하나 세워져있다.
오래된 것 같지는 않고 새로 만들어 세운 듯한데, 옆에 설명이 있어 살펴보니 지난 2000년 1월1일 새천년 행사 때, 시인 정인수 선생이 직접 짓고 낭독했던 시를 작년에 시비로 만들어 세웠다는 설명이다.

 소나무를 많이 식재한 탓에 정상이 주는 시원한 조망은 기대하기 어렵고 나무사이로 한라산이 보일 따름이다.
하산 길로 접어들고서야 정상보다 나은 경치가 펼쳐지는데, 삼첩칠봉이라는 말이 실감이 간다.

 일주도로변 정상에서 바닷가까지 마치 물결과도 같이 삼단의 능선이 이어지고 이 능선에 곳곳에 봉우리가 솟았다.
주봉에 이어 그 앞으로 앞오름, 망오름 펜안오름, 도산오름, 동나부기, 서나부기, 각각의 이름을 달고 바닷가로 이어지고 있다.

 이름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앞오름은 앞에 있는 오름이라는 뜻일 터이고, 망오름은 예전에 봉수대가 있던 오름이다. 동으로는 서우봉과 교신했고 서쪽으로는 사라봉과 교신하였다.
그리고 펜안오름은 편안한 오름이라는 뜻이고, 나부기는 정상부가 평평하여 나부죽하다는 뜻일 것인데, 도산오름이라는 이름은 나도 고개만 갸우뚱할 뿐 잘 모를 이름이다.

▲ 원래 산정화구호인데 지금은 절 마당의 연못이 되었다.

 굼부리를 한 바퀴 돌고 내려오니 아담한 연못이 기다리고 있다.
본래 이 오름이 갖고 있는 산정호수인데 지금은 절 마당의 조경용 연못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내려오는 길에 불탑사에 들렀다. 이곳이 원래 원나라 때 세워졌던 원당사 터인데 조선시기 억불정책으로 폐사가 되었다.
그 후 1914년 이 터에 안봉려관 스님이 사찰을 열고 불탑사라고 하였다.

 이곳에 5층 석탑이 있는데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유일한 석탑이고, 제주에 존재하는 석탑 중에 하나밖에 없는 고려시대 석탑이기도 하다.
매끈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탑과 달리 제주의 현무암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투박하기도 하고, 또 그 크기도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우리가 우리 것으로 만든 소중한 석탑인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전설 탓에 아들을 바라는 많은 여인들이 소원을 빌기도 한다.

▲ 오층석탑.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그리고 제주에 남은 유일한 고려시대 석탑이다.

 세 개의 능선에 일곱 개의 봉우리, 그리고 세 개의 사찰, 그리고 산정호수를 품고 있는 오름.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면 신령스럽기도 할 오름인데...
하지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