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늦게 온다고 투덜거리는 사이에 봄은 말없이 다가와 대지에 가득 찼다.
봄은 남에서 북으로 올라간다지만, 제주에서는 바다에서 한라산으로 올라간다.
한라산을 바라보니 얼추 절반 높이까지 연두색으로 채색되고 있다.
이제 그 붓질의 속도를 더해 저 꼭대기까지 연두색으로 진초록으로 덮여갈 것이다.
하늘마저 파랗게 열려 대지로 초대하는 날, 서쪽의 풀밭이 아름다운 오름으로 떠난다.

▲ 북쪽에서 바라본 원물오름

 원물오름
평화로가 대정방면과 중문방면으로 나뉘기 조금 전, 산방산이 보일 즈음 오른편으로 보이는 오름이다.
안덕면 동광리에 속하는 오름으로 해발 459m 비고는 98m로 그다지 높지 않은, 대신 길쭉하게 생긴 오름이다. 말굽형 굼부리인데 굼부리가 길게 형성되어 두 개의 기다란 오름을 붙여놓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평화로를 따라가다 광평교차로를 지나면 오른편으로 동광육거리 검문소로 빠지는 옛길이 나오는데, 이 길로 들어서면 검문소 가기 전 오른편으로 안덕면 충혼묘지가 나온다. 이곳 주차장이 이 오름 산행의 시작이 된다.
그 외에 평화로변 광평교차로에서 왼편 농로를 따라 감낭오름을 넘어서 오르는 길도 있다.

▲ 원물. 세 개의 연못이 있는데 그 중 식수용을 사용된 연못

 원물
조선시대, 오름 기슭에 샘이 있는데 이 샘을 생명수로 삼아 이곳에 원(院)을 설치했었다.
그리하여 샘의 이름을 원물, 그리고 그 뒤에 서있는 오름을 원물오름이라고 부른다. 한자로 원수악(元水岳)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또한 오름의 정상에 바위가 길게 일렬로 박혀있는데. 그 모습이 고고리를 닮았다고 고고리암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실 우리집안의 묘가 한기 이 오름 자락에 있는데 모둠벌초에 가면 고고리암으로 통용된다.
-고고리, 벼나 조등 곡식의 이삭을 제주에서는 고고리라고 한다. 나록고고리(벼이삭), 조코고리(조이삭),등으로 쓰인다.-

 잘 단장된 충혼묘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름길로 들어서니, 오름의 이름이 되는 원물이 맞이한다.
세 개의 연못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마도 하나는 마소들의 식수로 썼을 듯하고 , 또 하나는 빨래 등의 허드레 용도로 , 그리고 가장 자그마한 하나는 식수로 쓰였을 듯하다. 식수로 쓰였을 연못은 주변으로 돌을 쌓아 나름 신경을 썼다.

 안덕면 동광리, 예전에는 이 일대를 통틀어 자단이(自丹里) 또는 자단촌(自丹村)이라고 불렸는데 그 뒤 광청리(光淸里)로 불렸고 다시 동서로 분리하여 동광리와 서광리가 되었다.
그중 동광리의 교차로인 동광육거리는 제주 대정 한림 서귀포를 잇는 중산간의 중요한 교통요충지인데, 조선시대에도 역시 중요한 길목이었다.
또한 제주목 관아와 대정현의 관아를 연결하는 관도가 지나는 길이기도하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곳에 여행객들을 위한 숙소인 원(院)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었다.
이재수를 비롯한 많은 관아의 통인들이 문서를 들고 오갈 때 쉼터이기도 했고, 추사 김정희등, 대정으로 향하던 많은 유배객들의 무거운 발걸음을 잠시 멈추기도 했던 곳이다.

▲ 삼동나무 열매. 까맣게 익는데 아직 익지 않아서 군침만 흘리다 다음을 기약해야했다.

 높지 않은 비고와 화창한 날씨, 발걸음이 절로 가볍다.
도토리나무가 듬성듬성 서있을 뿐 키 작은 잡목들이 무성한데, 반가운 나무를 만났다. 삼동나무이다.
그것도 열매를 제주어 표현으로 ‘지락지락’ 매달고 있다.
어릴 적, 입이 새까맣도록 따먹던 훌륭한 간식거리 열매로, 하나씩 따먹는 것 보다는 한손바닥 가득 따서 한입에 털어 넣는 것이 더욱 맛있다.
그리고 이 녀석은 특이하게도 가을인 10월경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뒤 겨울을 지내고 봄도 거의 다 지난 6월 초, 보리가 익을 무렵에 까맣게 익는다.
세 계절과 겨울을 지내는 열매라서 삼동이라고 부른단다.
뭐 책에서 확인한 것은 아니고 소시 적 어머니에게 들은 내용이다.

▲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솜방망이, 할미꽃, 각시붓꽃, 구슬봉이.사진 편집 실력은 이해하시라.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어쩔 수 없다.

 쉬엄쉬엄 20여분을 걸어 능선에 올라섰다.
능선길 대부분이 천연잔디로 곱게 깔렸고, 여기저기 제철 야생화가 가득하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꽃대를 쑤욱 밀어 올려 여러 송이 노란 꽃을 피워낸 솜방망이.
무엇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들지 못하고 제 발등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할미꽃.
-아무래도 이름을 잘못 지었다. 수줍음에 고개도 못 드는 소녀 같은 모습인데 할미꽃이라니....-
아기별이 모여 있는 듯, 자주색의 주둥이를 별모양으로 벌리고 사랑의 메신저를 기다리고 있는, 이름도 예쁜 구슬봉이.
그리고 각시붓꽃까지 나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한라산. 나는 이 모습의 한라산을 보며 자랐다.

 멀리 동쪽으로는 한라산이 선명한데, 내가 항상 보아왔던 그 모습 그대로의 한라산이다.
혹자는 한라산이면 하나의 한라산 아니냐고 할 터이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서 그 모습을 모두 달리한다.
따라서 이 섬의 사람들은 태어난 고향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의 한라산을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리고 모두 자기 고향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의 모습을 가장 아름답다고 여기며 또 우기며 산다.
이곳의 방향이 내 고향마을과 같은 탓에 오랜만에 반가운 한라산을 만난 것이다.

▲ 산방산. 그리고 사진상 희미하지만 가파도와 마라도까지 조망된다.

 남쪽으로 시선을 주면, 평지돌출 형이라는 산방산이 우람한 모습으로 서있고, 그 뒤로 송악산과 가파도 마라도까지 시원하게 조망된다.
그리고 남쪽 길 건너 이웃에는 도너리오름이 솟았는데, 바로 그 도너리오름이 토해낸 용암이 만들어 놓은 제주에서 가장 넓은 곳자왈이 깔려있다.

▲ 북쪽에 늘어선 오름들. 앞에서부터 당오름 정물오름 금악오름이다. 정물오름은 당오름에 가려 살짝만 보이는 곳이다.

 북쪽으로는 당오름 정물오름 금악오름이 일렬종대로 섰다.
사방 어디로든 시야에 거침이 없는 오름이다.

 거의 같은 높이의 능선 길을 따라 북쪽 능선에 이르면 뒤편에 고고리암이라고 불리는 실체를 만나게 된다.
산 정상에 길게 화산암이 박혀 있는데 오름이 생기고 수만년, 북풍에 시달려 바위 아래가 굴처럼 파였다.
화산암이 풍화된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다.

 말굽형 굼부리이기는 하나 그다지 깊지도 않고 가시덤불도 별로 없어서, 원형굼부리 같이 능선을 한 바퀴 도는데 별 무리가 없다.
화창한 날씨와 아름다운 경관. 내려가기가 못내 아쉽다.

 제주도 서부지역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오름, 그런 만큼 서부지역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오름, 그리고 어쩌면 한라산이라는 신선들의 공간과 인간들의 살아가는 공간을 연결하는 오름, 이것이 이 오름의 매력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