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시에서 성읍리를 거쳐 표선으로 이어지는 번영로를 따라 가다보면 대천동 사거리를 만나게 된다.
이곳이 서부지역의 동광육거리와 같이 동부지역 중산간 교통의 요지인 곳이다.
여기에서 왼편, 비자림로를 따라 2.9Km, 송당 목장 입구를 조금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오른편 길을 오르미들 사이에선 흔히 '오름사이로'라는 별칭으로 부른다.
이길 '오름사이로'를 따라 3Km 정도를 가면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경계에 이른다. 이 경계표지가 있는 오른편에 주차장이 마련되어있고 오름 푯말도 설치되어 있다.

▲ 큰돌이미오름에서 바라본 백약이오름. 오른편에 보이는 오름은 좌보미오름이고 왼편에 보이는 오름이 거미오름이다.

 이 일대가 워낙 오름 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어서 오름 왕국이라고 불리는데 그 한복판에 자리한 오름이 바로 백약이오름이다.
송당리와 수산리를 잇는 길, '오름사이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이 오름 기슭까지 찾아오는 것도 힘든 일이었지만, 지금은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비단 이 오름뿐만 아니라 아부오름 거미오름 좌보미오름 등등의 여러 오름 들을 보다 가깝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백약이오름

 구좌읍 송당리와 가까워서 송당리 오름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속한 오름이다.
표선면의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경계에 해당한다.
해발 357m 비고는 132m이다.
백가지 약초가 난다고 하여 백약이오름으로 불리며, 그에 걸맞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소황금 자생지라는 푯말이 서있었는데, 이 푯말이 도채꾼들에겐 표적이 된 탓인지, 아니면 주차장을 만들면서 사라진 것인지, 그도 아니면 소황금이 이젠 사라져버린 것인지 푯말이 없어져 버렸다.
오름이 꽤 유명해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등산로를 잘 개설하여 놓았다.
그것도 힘들지 않도록 비스듬히 만들어서 제법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하다.

 사면이 거의 삼나무와 소나무 등 식재된 나무들이 무성한데 등산로가 있는 북사면만 봄풀과 키 작은 나무들로 채워져 있다.
국수나무와 쥐똥나무가 새순을 내밀고 있고 둥굴레가 작은 종모양의 꽃을 줄지어 달고 서있다.
나무가 인공으로 식재되지 않고 그냥 두었으면 오히려 더 많은 종류의 식생이 풍성하였으리라.

▲ 굼부리안에 물이 고였다.

 봄날의 걸음답게 느릿느릿 20여분을 오르니 능선에 다다른다.
가히 원형굼부리의 전형을 보는 느낌이다. 산정호수를 갖는 오름으로 분류되지는 않으나 얼마 전에 내린 비로 굼부리에 물이 고였는데, 모두들 처음 보는 모습이라고 좋아한다. 사실 나도 처음 보는 모습이다.

 1300m 정도의 굼부리 능선에 천연잔디가 깔려있다.
요즈음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 학창시절에는 해마다 한 번씩 체력장 검사라는 것이 있었다.
100m 달리기도 하고 턱걸이며 윗몸일으키기며 멀리뛰기 등등 이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하기 싫었던 것이 바로 오래달리기, 400m 트랙 두 바퀴 반을 뛰어서 도는 것인데 숨이 턱에 차고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매끈한 풀밭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보니 그때와 달리 한번 달려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만...

 능선을 따라 세 개의 아담한 봉우리가 있는데, 멀리서 보면 뫼산(山)자 같이 보인다고 한다.
번영로에서 보면 얼핏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두 개의 봉리는 그냥 봉긋한 풀밭인데 주봉은 제법 솟아올랐다.
그리고 주봉의 값을 하려는 듯 철쭉꽃으로 붉게 단장을 하였다.

▲ 정상에 철쭉이 만개했다.

 오름 왕국의 중심답게 주변으로 오름 들이 많기도 하다.
이름대로 높이 솟아오른 높은오름, 설문대 할망이 독특한 취향으로 빚어놓았다는 거미오름. 그리고 다섯 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는 좌보미오름이 모두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남쪽에는 영주산이 우람하고 더 멀리엔 올록볼록한 따라비오름이 아스라이 보인다.

 양탄자를 깔아놓은 듯 보드라운 능선 길을 한 바퀴 돌아 하산 길에 나섰다.
백가지 약초가 난다는 오름이라하여 이곳저곳 눈길을 주어보지만, 눈뜬장님에 다름없는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평범한 야초들뿐이다.

 언감생심 산삼이나 녹용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았던 민초들은 먹을 수 있는 들풀 백가지를 뜯어다가 솥에 넣고 오래 삶아서 그 진액을 먹었는데 그것을 '백초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 고정관념을 깨고 보면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약이 되는 것이다.
오름을 다니는 길에 가장 성가신 존재인 찔레와 청미래덩굴도 이뇨제로 쓰이고, 자리 깔고 앉을 때 꼭 엉덩이를 찌르는 엉겅퀴도 해열과 신경통에 썼다.
그리고 돌담위에 무더기로 자라서 꽃을 피우는 인동초는 '금은화'.
가을이면 맛있게 익어 간식을 제공하는 으름나무의 넝쿨은 '목통' 
길에 밟히게 널어진 질경이는 '차전초'라 하여 한방에서 지금도 요긴하게 쓰인다.
하기야 흔하디흔한 쑥과 마늘은 곰을 인간으로 만들어준 최초의 약초가 아니겠는가.

▲ 고사리가 하늘을 향해 종주먹을 내밀고 있다.

 약이 되는지 안 되는지 고사리가 제철이다. 덕분에 산행 시간도 고무줄 같이 늘어졌다.
제주에서 고사리는 물이나 공기같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졌다. 누군가의 밭에 돋아났어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 땅의 며느리들은 지금 철이 되면 너나없이 제사와 명절 차례 상에 올라갈 고사리를 준비해야했다.
어쩌면 하나의 의무 같은 것이었다. 거저 주어지는 것이다 보니 시장에서 팔지도 않았다. 사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저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이제는 이 고사리가 관광 상품이 되기도 하고, 지역 특산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도시락 싸들고 가족들끼리 모여서 나들이하는 핑계거리도 되었다.

 빨리 가자고 재촉해대는 나도 발밑에 보이는 고사리에게는 허리가 저절로 굽어짐은 어쩔 수 없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