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여름의 가뭄이 여간 아니다. 도시의 삶이 농경과는 거리가 있어서 비에 대한 목마름이 덜한 법인데, 도시에서도 느낄 정도이니 많이 가물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는 해마다 오던 고사리 장마도 건너뛰었다.

 이런 가뭄에 뜬금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산정호수를 다녀오기로 했다.
세상사가 항상 풍요로울 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아니 그보다는 어렵고 빈한한 때가 더 많은 법. 그 메마른 모습도 자연의 일부라서 그 모습을 담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위안하며 떠나는 길이다.

▲ 물영아리오름 전경

 제주의 오름 중에 머리에 물을 이고 있는 오름이 아홉 개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 가장 화려한 이력이 붙은 오름이 바로 물영아리오름으로 간다.

 지난1971년 이란의 람사르라는 곳에서 ‘물새 서식지로서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이라는 긴 이름의 협약을 18개국의 모여서 맺게 되는데, 이 협약을 이름이 너무 긴 탓에 '습지에 관한 협약'으로 줄여서 부르기도 하고, 보통은 지명을 따서 "람사르 협약"이라고 부른다.

 이 오름, 물영아리오름이 지난 2006년 10월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번째로 람사르 협약에 의한 습지로 등록이 되었다.
그보다 앞서 습지보호지역으로 지정하고 또 삼년여 일반인의 출입을 제한하기도 하였다.

▲ 오름 입구에서 만나는 산수국

 물영아리오름

 반듯한 원형분화구를 갖는 오름으로 분화구에 습지를 품고 있는 오름이다.
해발 508m이고 128m의 비고를 갖는다.
영아리라는 이름은 이곳 외에도 두 곳이 더 있는데, 신령스럽다는 뜻의 靈과. 만주어로 산을 뜻하는 아리가 합쳐진 이름으로 신령스러운 산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다시 이 오름 산정에 물이 있어서 물영아리오름으로 불린다.
한자로는 뜻 그대로 水靈山, 또는 水靈岳으로 표기된다.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 속하는 오름이다. 수망리 역시 여러 개의 오름을 품고 있는 마을인데, 특히 애지중지하는 오름이기도 하다.

 제주시에서 봉개동을 거쳐 번영로를 가다보면 남원으로 향하는 남조로를 만나게 되는데, 이 남조로를 따라 교래리를 지나고 사려니 숲길 입구인 붉은오름을 지나고 또 태흥목장을 지나면, 물영아리라는 표시와 함께 왼편으로 안내소를 비롯한 여러 가지 시설물들이 나타난다.
이름에 걸맞게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지 편의시설도 제법 갖추어져 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 오름 쪽 목장에 출입금지 표시부터 눈에 띄어 어리둥절하게 한다.
예전에는 이 목장을 가로질러 다니기도 했었는데 이제 길을 목장의 왼편을 끼고 진입하도록 돌려놓았다.
어려울 것 없이 친환경소재로 만들어진 매트가 깔려 있어서 길을 인도해 준다.

 진입로 입구에 안내소가 설치되어있는데 생태해설사 두 분이 반갑게 맞아준다. 그리고 오름, 아니 오름보다는 습지에 대한 설명도 해주시고 원하면 정상까지 안내 해주기도 한다.
잠시 둘러서서 습지에 대한 안내와 탐방로를 벗어나면 안 된다는 당부를 듣고 진입로를 따라 오름 쪽으로 향한다.

▲ 오름 자락에 초지가 아름다운 목장이 있는데 소들이 한가롭다.

 오름 전체가 식재된 삼나무와 자연림으로 가득한데 오름의 남녘 자락엔 매끄러운 초지의 목장이 있어서 소들이 한가롭다.
진입로를 따라 500m. 끝도 없을 것 같이 하늘로 이어진 나무계단이 기다리고 있다.

 계단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볼 때마다 달라서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880개라고 하기도하고 892개라고도 한다.
사실 오름을 다니면서 계단을 만나는 일이야 허다한 일이지만, 이 오름 계단의 숫자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만큼 계단을 오르기가 힘들어서이고, 또 이 오름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남는 것이 있다면 딱 두 개, 산정호수와 계단인 때문이기도 하다.
대략 40층이 넘는 아파트를 계단으로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맞을 듯하다.
그래도 전과 달리 세 곳에 쉼터를 만들어 놓고 해설사 분이 쉼터에서 쉬는 요령을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도 한다.
아무튼 이 계단이 많이들 회자되기는 하는 것 같다.

▲ 우리를 질리게 하는, 끝이 없을 듯 이어지는 나무계단

 그래도 울창한 산림이 만들어 주는 그늘과 숲이 주는 신선함에 감사하며 땀 흘리기를 15분, 능선에 올라섰다.
숲이 우거진 오름이라고 해도 해발고도가 높은 오름들 빼고는 대부분 능선에 서면, 그래도 하늘이 보이고 주변의 풍광도 눈에 들어오는 법인데 이 오름은 전혀 조망이 없다.
산정호수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하고 내리막을 따라 산정호수로 들어섰다. 바닥에 내려설 수는 없고 탐방로를 따라가는 길인데 습지를 잘 관찰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 산정호수의 모습. 오랜 가뭄으로 물은 가운데 부분만 남았다.

 짐작은 하고 왔지만 주변으로는 물이 말라 거북이 등짝이고, 물은 가운데로 몰려 있다.
그래도 수초들은 아직 푸르름을 잃지 않고, 호수 가득 물이 출렁대는 풍요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무성한 자연림이 능선을 넘어 호수의 물가까지 내려와 있는 모습이, 흡사 귀한 물건을 보드라운 천으로 싸안고 있는 형상이다. 숲도 이 습지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는 듯이.

 -방목중인 소를 잃어버린 테우리가 소를 찾아 헤매다 이곳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상심치 말고 돌아가 열심히 소를 기르도록 하여라. 앞으로는 소들이 물을 찾아 헤매다 길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겠다"하고 사라졌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물이 넘실대는 큰 연못이 생겨났다. 그리고 그 후로는 소들이 물을 찾아 나섰다가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졌다. -

 오름 입구에 이 산정호수에 대한 전설을 써서 세워놓았다.
지금은 습지로서 소중한 곳이지만 예전에는 마소들의 생명수로 소중했던 곳이다.

 이 호수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에게 하루빨리 단비가 내리고 푸른 물이 넘실대는 풍요의 시기를 소망해 본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