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이 계절이면 더위를 피해 한라산 중산간지대 위쪽, 산림이 울창한 곳을 찾곤 했는데 오늘도 1100도로를 따라가 볼 요량으로 나섰다.

▲ 돌오름 전경. 안덕면 위생처리장 부근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1100도로
지금의 평화로가 개통되기 전 이 도로는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도로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장비도 별로 없던 시절 오년여의 난공사 끝에 1973년 완공된 이 도로는, 그 이름과 같이 도로의 정점이 해발 1100M의 고지에 다다라서 우리나라 국도 중 가장 높은 도로이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은 제주특별자치도 출범과 함께 지방도로 격하되어, 그 지위는 상실한 터이다.
도로의 정상엔 휴게소가 마련되어 쉼터와 전망대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서귀포나 또는 제주시를 가기 위해 이 길을 이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이용자의 대부분이 한라산을 찾는 등산객이거나 겨울철 설경을 즐기려는 관광객들이어서 관광도로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1100고지 휴게소에서 잠시 쉬는데, 인간들이야 더위에 지치던 말던 숲의 나무들은 이 여름을 즐기기에 여념이 없다.
이 따가운 햇살을 풍성한 식사로 즐기고 있는 것이다.
휴게소를 지나 영실입구에 이르기 조금 전 쯤 오른쪽으로 비포장 임도가 나타난다. 산행이 시작되는 곳이다.

 몇 년 전만해도 길 가운데까지 조릿대가 침범하고, 찾는 이 없이 버려졌던 길이 근래 오름과 숲을 찾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아예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로 확장되었다.
재작년 쯤 행정기관에서 임도를 개설했음이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산불의 우려가 있어서 소방용 임도가 필요하다는 것이 행정당국의 변인데, 어쨌든 예전의 그 호젓하던 맛은 사라져버렸다.

▲ 억척스럽게 살아남았다.

 커다란 나무가 바위위에 자랐는데 바위를 감싸고 뿌리를 내렸다. 주어진 운명에 굴하지 않고 굳세게 이겨낸 모습이 참 대견스럽다.

 임도로 들어서자 이내 두 갈래로 길이 나뉘는데, 왼편 서쪽을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누군가 몇 년 전에 다시 표고밭을 조성해 놓았는데 무엇이 어긋났는지 방치되어있다.
어떤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농사를 작폐할 요량이면 깔끔하게 정리를 해놓았으면 좋으련만...

 30여분을 가니 돌오름 가는 길이라고 누가 판자에 적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았다. 누구의 정성인지 웃음이 나온다.
길은 이제 임도를 버리고 예전의 좁은, 달구지 하나 겨우 다녔을법한 길로 이어진다,

 그리곤 잠시 후 커다란 계곡을 만난다.
한라산 특유의 건천이다. 평소에는 물이 흐르지 않고 말라있는데 산에 큰비가 오면 거칠게 흘러내린다.
이른바 '내 터졌다'라고 표현하는데 큰물과 함께 바위돌이 구르고 굉음을 내며 흘러내리는 것이 여간 난폭하지 않다.
더욱이 위험한 것은 이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더라도, 높은 곳에 내린 비가 흘러내려 예고도 없이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든 지금은 조용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가을날에 오면 계곡 양옆으로 단풍이 고운 곳이기도 하다.

▲ 제주도 특유의 건천

 다시 숲이 주는 향긋한 내음과 맑은 새소리, 산수국의 아름다운 자태와 조릿대의 사각거림을 즐기며 10여분.
길 옆 나무에 마치 서낭당 나무에 소원이 걸리듯 이것저것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드디어 오름 자락에 다다랐고 우측 등산로로 접어들라는 표식이다.
너도나도 하나씩 매달았는지 여러 가지 색깔의 천에서부터 물병 심지어 막걸리병도 매달려 있다.

 등산로로 접어드니 무릎 높이의 조릿대가 바닥이 안보이게 무성하다.
그리고 언제 적에 심어진 것인지 아름드리 삼나무도 사면을 따라 즐비하다. 조릿대를 헤치며 십여 분 오름 자락을 끼고 돌면 세 갈래 길이 나오고 왼편 오르막으로 난 길이 오름 정상을 향하는 길이다.
정상을 향하는 오르막길엔 갖가지 나무들이 서로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고, 바닥엔 철지난 박새들이 볼품없이 서있다.
큰 천남성은 커다란 잎사귀를 벌려 나무 틈새로 떨어지는 햇빛을 담아보려 애를 쓰고 있다.
능선에 올라 숨을 고르고 왼편 정상으로 향하자 나무들의 키가 작아지고 한달음 거리에 정상이 나타나다.

▲ 돌오름 정상에서 보이는 한라산의 모습

 돌오름 정상에 섰다. 멀리 영실 오백장군 너머 한라산이 우람한 모습을 드러낸다.
힘들게 찾아온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는 더없이 훌륭한 정경이다. 매번 볼 수 있는 모습도 아니다. 아니 구름과 안개에 싸여 볼 수 없는 경우가 훨씬 많다.
이 오름에서 하늘을 볼 수 있고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는 이곳 정상뿐이다.
그만큼 울창한 수림지대에 위치한 오름이다.
또한 이곳은 서귀포시 안덕면과 제주시 애월읍이 만나 경계를 이루는 지점이기도 하다.
북쪽 사면에는 과거에 표고를 재배했던 농장 터가 있고 허물어져 가는 관리사도 인간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해발 866M 비고 71M 원형 굼부리로 분류되기는 하나 서쪽 등성마루가 낮아지면서 파괴되어 말굽형이란 착각이 들기도 한다.
북쪽 능선에 바위들이 줄지어 박혀있는데 이 바위들 때문에 돌오름이라고 불린단다.
혹자는 울창한 수림과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없던 탓에 길을 찾기 어려워 돌고 돌아가서 돌오름이라고 부른다고 농을 하기도 한다.
굼부리 안에도 온통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로 그 형태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 돌오름의 돌

 원형 굼부리의 형태가 완전하지는 않지만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길이 나 있어서 한 바퀴 돌고 내려오기로 했다.
굼부리를 돌고나서 올라갔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 이제 발길을 영실방면이 아닌 서남쪽 영아리오름 방면으로 돌려 광평마을로 길을 잡았다.

 40여분 예전보다 지루해진 길을 걷는데 앞에 영아리오름이 막아선다.
신령스런 산이라는 뜻을 가진 오름이다.
이제 이 오름을 지나면 선계를 떠나 다시 속세로 들어서는 길이다.

 꿈을 꾸듯 숲속을 거닐다 나온 산행이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