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는 날이다.
많이 내리는 것도 아니고 딱 걷기에 불편할 만큼 내리는 날이다.
사실 비가 내리면 누구나 그렇듯 산으로 나서기가 망설여지는 법인데, 그래도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회원들이 있어 어쩔 수없이라도 나서기로 한다. 혼자 나서는 길이라면 진즉에 그만둘 터인데 서로가 있어서 서로에게 기대어 나서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 오름의 전체 모습을 담기가 어려운 오름이다. 셋궤펜이오름을 오르는 중에 빗속에 드러나는 큰궤펜이오름

 지도를 놓고 제주도의 동쪽을 살펴보면 한라산 주봉에서부터 사라오름~성널오름~물오름~궤펜이오름, 그리고 물찻오름~붉은오름으로 이어지는 오름선을 볼 수 있다.
오늘은 산남과 산북을 나누는 등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이 오름선의 가운데 부분에 위치한 오름, 궤펜이오름을 가고자 한다.

 궤펜이오름
동쪽에서부터 큰궤펜이오름 셋궤펜이오름 그리고 섯궤펜이오름이 이어지는데, 이 세 개의 오름을 통칭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모두 조천읍 교래리에 속하는 오름으로 또 모두 원형굼부리를 갖는 오름이다.
한라산의 중산간 자연림 지대에 숨어있는 오름으로 해발 750m~800m 정도에 세 오름이 위치한다.

▲ 비가 내리는 숲길

 이름에서 짐작하듯이 크기가 모두 다른데, 이름 그대로 큰궤펜이는 비고가 167M에 달해 제법 높은 오름에 속한다.
그리고 한라산 방면으로 이어지는 셋궤펜이는 가장 비고가 낮아서 37m이고 섯궤펜이오름은 59m이다.

 크기가 순서대로였다면 큰궤펜이, 셋궤펜이, 족은궤펜이로 불렸을 터인데, 둘째와 셋째의 크기가 뒤바뀌는 바람에 서쪽에 있다고 섯궤펜이오름으로 명명 되었다.

 '궤'라는 말은 제주에서 '굴'을 칭하는 말로, '궤펜이'라고 하면 '굴이 패인'이라는 뜻이 된다.
즉 큰궤펜이오름 북동쪽 사면 기슭에 굴이 패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로 제주에서는 '굴'이라고 하면 '계곡'을 이르는 말이 된다.
한라산의 주요 등산로인 관음사 코스에서 만나는 '용진계곡'을 제주어로는 '용진굴'이라고 한다. 용이 승천하지 못하고 진 계곡이라는 뜻이다.

 5.16도로를 따라 서귀포방면으로 가다가 비자림로 입구를 지나고 성판악을 1.5Km 남긴 지점 왼편으로 농로가 있어 차에서 내렸다.
내리자마자 반기듯 뿌려주는 빗줄기에 모두들 비옷을 챙겨 입고나자 모두들 형형색색 우중충한 분위기는 모두 사라졌다.
침울할 듯도 한데 "빨간 우의 노란 우의 찢어진 우의~" 가사를 바꿔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들뜬 발걸음을 시작한다.

 작업차가 한 대 정도 다닐만한 비포장 길을 걷노라니 숲 사이로 박새가 꽃대만 남기고 잎사귀를 떨구고 있다.
초봄, 아직 잔설이 채 가시기 전에 부지런히 새싹을 밀어 올리더니, 이제 겨우 여름의 길목에 들어서는 계절, 남들은 한창 신록의 기쁨을 맞이하는 시기에, 벌써 생을 마감하고 내년을 기약하려 하고 있다.
참 성격도 급한 녀석이다.

▲ 박새

 넙거리오름의 기슭을 끼고 나아가는 길을 따라 15분, 천연잔디가 고운 표고사에 도착한다.
오름 방면을 어림잡아 올려보는데 울창한 산림과 안개밖에 보이질 않는다.
이 오름은 숲속 깊은 곳에 있어서 어디에서도 그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기 힘든 오름이긴 하다.
겨울철 나무가 모두 옷을 벗고 나면 나뭇가지 사이로 조금 보일 뿐, 더구나 오늘은 비까지 내리는 날이면 언감생심이다.

 표고사를 지나 조릿대가 울창한 조그만 오솔길을 따라가니, 다시 제법 큰 건천이 하나 나온다.
이 빗속에서도 사진들을 찍는다고 잠시 쉬고, 이 건천을 건너 5분정도를 가니 갈림길이다.
큰궤펜이오름과 셋궤펜이오름의 사이에 해당한다.

 먼저 큰궤펜이를 오르기로 하고 왼편으로 들어서니 이내 오르막이 이어진다.
평지를 걸을 때에는 잘 모르지만 오르막을 오르려니 비옷이 무릎에 감기는 것이 여간 불편하지 않다.
제법 비고가 높은데다가, 내리는 비로 길까지 미끄러우니 몇 배는 더 힘이 든다.
우의라고 입었지만 밖은 비로 젖고 안은 다시 땀으로 젖어든다.
두어 차례 쉬엄쉬엄 능선에 다다르고 능선길을 따라 동쪽으로 나아가니 정상에 해당하는 공터가 나온다.

▲ 정상부의 공터. 산수국이 비에 젖어들고 있었다.

 세 개의 오름을 통틀어 그나마 조망이 있는 곳이 겨우 이곳인데, 오늘은 아예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다.
본래부터 나무가 없던 곳은 아니고, 예전에 이곳에 산림보호라고 쓰인 커다란 철탑이 서있었는데, 관리가 안 되다보니 반쯤 허물어져서 그 자체가 자연경관을 망치는 흉물이 되어있었다.
그랬던 것이 지금은 철 구조물들이 말끔히 치워져서 약간의 조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정상이라고 마냥 감상에 빠질 계제가 아니라서 다시 발길을 재촉하려는데, 뿌리가 다른 두 개의 나무가 팔을 내밀어 서로 마주잡았다. 연리지이다.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윽한 눈길을 상상해본다. 신기한 모습에 모두들 한마디씩 하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 연리지

 두어 차례 갈림길이 나오는데 굼부리를 끼고 오른편으로만 돌아, 올라오던 길을 다시 만났다.
이제 하산길이다.
그리고 연이어지는 셋궤펜이오름과 섯궤펜이오름을 오르고,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왔다.

 울창한 숲속을 걷는 우중산행. 여름날 한번쯤 걸어볼만한 산행이 아닐까 싶다.
가만히 어깨를 두드리는 빗줄기를 맞으며 세속의 먼지도 씻어 내리고, 마음속의 앙금도 씻어 내리는 시간이 될 수도 있을 터이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