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계획은 영아리오름을 향할 예정이었다.
얼마 전에 비도 내리고 해서 영아리오름의 숨겨진 연못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집을 나서려니 서쪽하늘이 요란하다. 하늘은 짙은 먹물을 풀어놓은 듯 하고, 번개가 선명하게 먹구름을 가르며 번쩍이고 있다.
그리고 뒤따라 고함을 치듯 천둥소리도 들려온다.

 오십년을 살면서 죄 없이 살았노라고 자신하기 힘든 범부로서 두려움이 없지 않을 터이다.
또 영아리오름이라는 곳이 대체로 숲으로 이루어지긴 했으나, 정상부근이 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져 여기에 서있다가는 내가 피뢰침의 역할을 대신해야 할 상황이다.

 그래서 장소를 바꾸기로 했다. 하늘에서 내려다봐도 찾기 힘든 숲이 울창한 곳으로.

 말찻오름
조천읍 교래리에 위치한 오름으로 동쪽으로 벌어진 전형적인 말굽형 굼부리를 갖는 오름이다.
그러나 해발 653m에 위치하는 만큼 자연림이 무성하여 굼부리 전체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할 수는 없고, 나무사이로 보이는 모습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는 오름이다.

 바로 남쪽에 물찻오름이 있는데 워낙 유명한 오름이다보니, 말찻오름이라는 이름이 짝퉁 정도로 여겨질 법도 하다.
하지만 물찻오름은 산정에 물이 있어서 물+잣성의 의미로 생긴 이름이고, 이곳은 말+잣성의 의미로 생긴 이름이라고 해석한다.

▲ 삼다수 숲길 안내 지도

 조선 숙종 조에 제주목사로 부임했던 이형상목사라는 분이 있는데, 일 년을 이곳 제주에서 지내는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남긴 목사이다.
절 오백 당 오백을 허물어버렸다고도 하고, 사백여명의 무당을 매질하여 귀농시켰다고도 한다.

 후세의 평가야 어찌하던 참 부지런한 목사임에는 틀림이 없어서 '탐라순력도'라는 귀중한 자료를 남겼다.
이 탐라순력도 중, 산장구마(山場驅馬)라는 그림에 이 일대에서 말을 점고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1702년 가을에 있었던 이 행사에는, 6500여명의 몰이꾼들이 동원되어 말 2300여 마리를 취합하여 점고를 했다고 적혀있다.
오름 동쪽에는 지금도 한국마사회가 운영하는 경주마육성목장이 있는데 우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물찻오름의 명성에 가려져서 찾는 발길이 뜸했던 오름이었다.
그러나 몇 년째 물찻오름이 출입이 금지되고, 또 삼다수 숲길이 개설되면서 그와 더불어 찾는 이들이 늘어난 오름이다.

 남조로를 따라 교래사거리를 지나면, 삼다수 숲길이라는 안내표지를 만날 수 있다.
이 안내를 따라 농로를 한참 걷고 나면, 본격적인 숲길 안내표지와 길 전체를 그려놓은 지도표지를 만날 수 있다.

 삼다수 숲길은 먹는 샘물 삼다수로 유명한 제주개발공사와 교래리에서 옛 임도를 활용하여 만든 숲길인데, 1코스와 그보다 긴 2코스로 나뉜다.
둘이 다른 곳에 있는 길은 아니고 1코스 위에 덧붙여진 길이 2코스이다.
두 코스 모두 비슷한 정취를 갖는 길로 길이의 길고 짧음이 다르다.

 숲길로 들어서자 조림된 삼나무군락이 먼저 맞이한다. 그리고 작은 실개천을 건너자 천연림이 무성한 숲으로 이어진다.
옆으로 제법 큰 하천을 끼고 여정이 이어지는데 오전에 비가 많이 내렸는지 물줄기가 제법 거칠게 흘러가고 있다.

 제주에 있는 대부분의 하천은 건천이라서 평소에는 말라 있다가,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고 나면 급류를 형성하여 흐르게 된다.
제주의 표현으로 '내 터졌다'라고 표현하는데, 섬 자체가 경사가 있는 만큼 물살이 거세고, 바윗돌들이 함께 굴러오는 경우가 많아서 위험하다.
그래도 자주 볼 수 없는 장관에 잠시 넋을 빼고 구경을 했다.

▲ 평소 조용하던 건천이 요란스럽다.

 조릿대를 헤치고 걷자니 1코스와 2코스의 갈림길이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원래 목적이 오름을 찾는 것이라서 짧은 길을 택했다.

 군데군데 피어난 산수국은 이제 가화를 모두 뒤집었다. 할 일을 마쳤다는 뜻이겠지.
대신 흔히 볼 수 없는 말나리가 화사하게 꽃을 피웠다.
계주를 달리는 선수들이 서로 바통을 넘겨받듯이.

▲ 말나리. 빗물을 머금고 있다. 동물은 비에 젖으면 처연해 보이는데 식물은 비에 젖으면 더욱 싱그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다시 2코스와 만나는 지점, 남쪽으로 삼다수 숲길이 아니라는 푯말이 서있다.
그렇다. 삼다수 숲길을 벗어나서 말찻오름으로 가는 길이다.
이제 103m의 비고를 올라가야 한다. 남쪽으로 조금 가면 오른편으로 송전탑이 세워져 있고, 이 송전탑을 지나면 다시 두 갈래 길을 만나게 된다.
여기까지 오면 어느 길을 택하더라도 오름의 정상으로 향한다.
등산로가 오름의 능선을 따라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나 있어서 왼편으로 돌던 오른편으로 돌던 한 바퀴 도는 길이다.

 오른편으로 돌기로 했다. 이 길이 정상을 조금 빨리 가는 길이다.
물론 그런 만큼 경사가 급하게 이루어져있다.

 지난겨울 눈이 하얗게 쌓였을 때 찾았었는데 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막아선다.
헐벗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 죽은듯했던 나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푸르른 생명을 과시하고 있고, 혹여 죽은 나무들까지도 여러 가지 버섯들을 길러내고 있다.

▲ 정상에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삼다수 공장. 구름이 내려앉았다.

 드디어 바위들이 박혀있는 정상에 섰다.
온통 자라난 나무들이 들어찬 가운데, 남쪽으로 물찾오름이 살짝 드러나고, 북쪽너머로 지하수를 빨아올리는 삼다수 공장이 보일뿐이다.
오전에 내리던 비는 개었지만, 하늘 까지 갠 것은 아니라서, 그나마 보이던 조망조차 멀리 보이던 것은 구름 속에 가렸다.

 좁은 바위틈에서 서로 추억을 남기느라고 한바탕 부산을 떨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올라오던 길이 가파르고 험한 길이라면 굼부리를 돌아 내려가는 길은 호젓한 느낌마저 주는 느슨한 길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심호흡과 함께 삼림욕이라도 즐기라고 권하는 것 같은.

▲ 호젓한 하산길

 조릿대인 것은 분명한데 키가 한 뼘에도 못 미치는 조릿대 군락을 만났다.
유전자가 그런 것 인지 아니면 이곳의 토양이 유별나게 척박한 것인지 모를 일이다.
멀리서 보면 잔디밭같이도 보일 키 작은 조릿대 군락이 펼쳐져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오름길과 숲길을 돌아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
언제나 그러하듯 숲길을 걷는 산행은 다른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느낌이다.
숲의 향기와 나무그늘이 주는 육체적인 시원함과 함께, 번잡한 삶을 잠시 내려놓는 시원함이 함께한다.
이 아름다운 숲길을 만들어준 제주개발공사에 고마움을 전한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