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오름 중에는 같은 이름을 갖는 경우도 많이 있다.
검은오름이 그렇고 또 민오름이라는 이름을 갖는 오름도 다섯 개나 된다.
지금이야 교통이 발달해서 섬의 동쪽에서 서쪽까지 두 시간이면 갈수 있지만, 발품에 의지해야했던 옛적에는 사람들의 활동범위가 한정되어 있어서 같은 이름이라도 별 불편함 없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이런 경우 오름의 이름 앞에 지명을 접두사로 붙여줘야 한다.

▲ 붉은오름. 남조로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오름이 길에 붙어있어서 길이 오름 귀퉁이를 잘라먹고 지나간다.

 붉은오름이라고 불리는 오름도 세 개가 있다.
그 중 애월읍에 있는 붉은오름은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을 맞아 최후의 일전을 벌인 곳인데, 그때 삼별초의 병사들이 흘린 피가 산을 붉게 물들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양리 섭지코지에도 붉은오름이 있는데, 워낙 유명한 관광지이다 보니 오름이라는 느낌조차 희미한 오름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찾고자 하는 또 하나의 붉은오름이 있다.

 붉은오름
한라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 성산일출봉까지 이어지는 경사면의 중간쯤에, 그리고 제주의 동부지역을 남북으로 이어주는 남조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오름이다.
그러고 보면 제주의 동부지역 정중앙에 위치하는 오름이다.
남조로의 가장 높은 지점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나뉘는 곳에 위치하는 탓에 남원읍이나 조천읍의 어디쯤 같지만, 표선면 가시리에 속하는 오름이다.
해발 569m, 비고는 129m로 특이하게도 오름 중턱에 원형굼부리를 품고 있는 오름이다.

 여름이 최정상에 다다른 무더운 날, 바다보다 숲이 주는 상쾌함이 좋아서 모인 길동무들과 길을 떠난다.
제주시를 동쪽으로 벗어나서 탁 트인 번영로 그리고, 남조로를 따라 가면 한라산 아래 첫 동네라는 교래리가 나오고 더 지나면 경주마육성목장을 지난다.
그리고 길가에 커다란 장승이 서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데, 이곳이 요즘 한창 뜨는 사려니 숲길의 입구이다.

 붉은오름이 이 사려니 숲길 옆에 있어 이곳에 차를 세웠다.
이곳도 해발고도가 400m를 넘어서는 곳이라서 그런지 도심보다는 한결 더위가 누그러져 있다,
예전 한적하기만 하던 임도 입구에는 숲길 걷기의 열풍을 반영하듯 포장마차까지 한 대 서있다.
이 임도(사려니 숲길)을 따라 오분 정도를 걸어가니 오른편으로 붉은오름이라는 안내표지가 보인다.
그리고 하늘을 떠받치듯 늘어선 삼나무 사이로 등산로가 번듯하게 나있다.
참으로 격세지감을 실감케하는 오름이다. 불과 사오년 전 만해도 가시덤불을 헤쳐야했던 오름이었다.

▲ 굼부리 안의 억새 군락

 십여분 올라서 능선에 다다르니 길은 네 갈래로 나뉜다. 왼편이나 오른편 길은 모두 정상에서 다시 만나는 길이고 직진하는 길은 굼부리로 내려서는 길이다.
오름 전체가 울창한 숲으로 덮여있는데 굼부리 안에 유독 무성한 억새밭이 있다. 그 모습을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물이 고인 오름으로 보일 듯하다.

 몇 년 전 외국인과 함께 이곳에 동행한 적이 있었는데 "환타스틱"이라고 표현했던 굼부리이다.
억새도 잘 자라서 사람 키를 넘어선다.
또 한쪽에는 양아가 무성하게 자랐다.
제주에서는 양애라고 불리는 풀로, 9월 무렵 꽃대가 올라오면 채취해서 무쳐먹는다. 특히 추석 차례상에는 빠지지 않던 음식이기도 하다.

 초가집이 대부분이던 시절, 초가지붕의 낙수물이 떨어지는 곳에는 어김없이 이 양아를 심었다.
뿌리가 서로 엉키면서 밀집하여 자라기 때문에 낙수물에 땅에 패이는 것을 막아주고 또 특이한 향 때문에 뱀의 접근을 막아준다고 하였다.
이제는 콘크리트가 점령하다보니 민가에서 거의 사라지고 이렇게 오름으로 밀려나 있다.

▲ 참으로 할 말이 많을 듯한 나무이다.

 다시 길을 나서 능선으로 올라서는데 이 오름을 상징한다는 바위가 버티고 막아선다.
바위 자체보다도 더 경이로운 것은 6~7m는 족히 넘을 듯한 바위를 뿌리로 단단히 움켜쥐고 자란 나무이다.
그저 묵묵히 자라는 것 같은 나무들도 수많은 사연을 안고 살아가고 있으리라. 이 뿐만이 아니라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심하게 비틀린 나무도 애처로운 시선을 붙잡는다.

 대체로 오름 능선은 기복이 크지 않는데, 이 오름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북쪽능선이 불쑥 솟아올라 정상을 이루었다. 그런 탓에 오름을 두 번 오르는 느낌으로 걷는다.
굼부리를 나서 십여분 남짓, 드디어 정상에 섰다.
예전에는 정상에 서더라도 울창한 숲으로 인하여 조망이 전혀 없었는데, 근래에는 이곳에 전망대를 설치해 놓았다. 고마운 일이다.

▲ 정상에서 보이는 오름 군락들

 전망대에 올라서니 불어오는 바람도 시원하고 사방으로 탁 트인 시야도 시원하다.
서쪽에 우람한 오름은 물찻오름이다.
제주의 산정호수 중 가장 풍부한 수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오름이지만, 지금은 식생의 보존을 위해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길 건너 동쪽에는 개의 머리 형상이라는 구두리오름이 엎드려 있는데 어디가 개의 머리를 닮았는지는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남쪽으로 여문영아리와 물영아리오름이 나란히 서있다.

▲ 내려오는 길. 새로운 길이 생겼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아쉬워도 걸어야 하는 길이 있어서 다시 숲속으로 내려섰다.
능선 길에서 북쪽으로 예전에 없던 길이 새로 생겼다. 올라오던 길과는 달리 나무계단을 깔고 잘 정돈된 길이다.
올라올 때 두 번에 나눠서 올랐던 길을 한 번에 내려가야되는 탓인지, 제법 경사가 심하다.
그렇지만 내리막 아닌가. 조심조심 내려서니 다시 삼나무 숲이 울창하고 그 속에 동화에 나올법한 집들이 나타난다.

 아~하! 이곳에 휴양림을 만들었구나.
이 새로운 등산로도 그 휴양림의 일부이고.
꼬마아이 둘이 우산을 접어서 말타기 놀이를 하고 있다. 어릴 적 우리도 대나무 막대기로 저렇게 타고 놀았지...

 오후에 길을 나서 제법 큰 오름 두 개를 돌아 나오니 어느덧 해는 한라산을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 수 만년 이어온 이 땅의 역사에 또 하루를 보탠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