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이기는 겨울이 없고 가을을 이기는 여름이 없다더니, 몇 차례 태풍이 지난 들녘은 시나브로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를 불러낸다.
번영로를 따라 제주시를 벗어나면 넓은 들판이 나오는데 ‘바농뱅뒤’라고 부르는 벌판이다.

 ‘바농’이라고 하면 바늘을 뜻하는 제주 말이고, ‘뱅뒤’라고 하면 ‘드르’와 함께 들판을 이르는 제주 말인데 ‘드르’는 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평야지대를 지칭하는 말이고, ‘뱅뒤’는 비교적 거칠어서 농사보다는 목장으로나 쓰일법한 곳을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바농뱅뒤’라고 하면 거친 들판에 가시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시나무가 많다보니 조선시대에 이곳에 목장이 개설되었는데 그 이름도 침장(針場)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들판에 커다란 오름 하나가 솟아올라서 그 이름을 바농오름이라고 하였다.
오늘 우리는 바농오름으로 간다.

▲ 돌문화공원에서 바라본 바농오름.

 바농오름.
이두 식으로 한자화해서 반응악(盤凝岳), 그 뜻을 따라서 침산(針山) 또는 침악(針岳)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조천읍 교래리에 속하는 오름으로 해발 552m 비고는 140m 정도로 꽤 큰 오름에 속한다.

 언뜻 보기에는 원형굼부리 하나를 갖는 오름으로 보이지만 옆구리에 말굽형굼부리를 하나 더 달고 있는 오름이다.
즉 복합형 굼부리를 갖는 오름이다.

 번영로를 달리다보면 교래리를 거처 남원으로 향하는 남조로를 만나게 되는데, 이 남조로를 따라 1.6Km 정도를 가면 오른편으로 이기풍 선교기념관이라는 표지와 함께 남조로의 옛길이 나온다.

 이 길로 들어가면 오른편으로 다시 시멘트 포장길이 이어지고 이 길을 따라 가면 조천관광목장이라는 표지석을 만난다.
예전의 침장이 이제는 조천관광목장이 된 셈이다.
이곳에 차를 세우고 오름 쪽으로 살펴보면 오름 가꾸기 푯말과 함께 정비된 등산로가 맞이한다.

 산세가 불끈 솟아오른 모습에 만만찮은 비고를 갖다보니 초입부터 탐방객의 기를 누른다.
산허리 아래로 돌아가며 삼나무와 측백나무가 즐비하게 조림되어 있고 중턱 이후로는 자연림이 무성하다.
길은 돌계단과 폐타이어로 가꾸었으나, 코스를 좀 더 아기자기하게 꾸몄으면 하는 아쉬움이 진하다.
가뜩이나 경사가 심한데 일직선으로 길을 냈으니 누가 걷더라고 투덜거리지 않을 리 없다.

▲ 드디어 정상이 보인다.

 두어 번을 쉬어가며 땀을 훔치고 걷는데 자연림사이로 하늘이 보이고 파란 지붕위로 카메라가 한 대 보인다.
정상이 가까웠음이다.
정상에는 경방초소와 함께 그 지붕에 감시 카메라를 설치해놓았다.
그 만큼 주변경관이 탁 트인 곳이라는 증명일 것이다.

 맨 먼저 발아래로 보이는 곳은 돌문화공원이다.
백만 평의 드넓은 들판에, 제주를 상징하는 돌이라는 주제를 이용하여 만들어진 테마공원이다.

 예전 제주시에 목석원이라는 사설관광지가 있었는데 이 목석원과 당시 북제주군이 의기투합하여 만든 곳으로, 말하자면 민관합동으로 추진된 공원이기도 하다.
설문대할망의 전설과 오백장군을 주제로 제주현무암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이 오름과 함께 둘러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멀리 서쪽으로 한라산이 보이고 오름 들이 줄을 지어 서있는 모습이 보인다.
한라산 백록담의 동쪽에서 북동쪽으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흙붉은오름~물장오리오름~ 개오름~ 절물오름~ 민오름~ 지그리오름, 그리고 이곳 바농오름 또 반대편으로는 새미오름을 거쳐 괴살메와 삿갓오름이 줄지어 서있다.
그리고 이 바농오름은 딱 그 중간에 위치해 있다.

 육지부의 산맥과 닮기도 하고, 또 다르기도 한 모습이다.
지질학자들의 표현을 빌면 이른바 ‘구조선’이라는 것이다.
지각운동으로 생긴 단층을 따라 생겨난 오름의 선이라는데, 이외에 한 개의 선이 더 있다.

▲ 깊이가 약 25m정도의 야트막한 굼부리

 접시같이 야트막한 굼부리를 따라 한 바퀴 도는 길이 나있다.
키 작은 나무들이 무성한 굼부리를 따라 돌면서 초가을의 정취를 찾아본다. 부지런한 억새는 벌써 꽃대를 밀어 올렸다.

 굼부리를 한 바퀴 돌고 원래의 길로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아무런 시설도 없고 찾는 이도 없지만 그래도 이름은 관광목장인데, 한번 둘러봄이 어떠냐는 제안이 있어 서쪽으로 하산 길을 잡았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이라 길은 희미하게 끊어질듯 이어진다.
희미한 발자취를 따라 미끄러지기를 몇 차례, 바농오름과 조근지그리오름 사이 초원으로 나왔다.

▲ 물봉선이 무리를 지어 피어났다.

 이 초원에도 초가을의 정취는 오롯하다. 이 계절을 대표하는 야생화 물봉선이, 그의 꽃말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말하려는 듯 새초롬하게 꽃을 피웠다.

 이제 시멘트 길을 따라 왼편으로 돌아가면 주차장이다.
내친걸음, 발걸음을 돌문화공원으로 옮긴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