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의 계절이 왔다. 
아직은 일상적으로 표현하는 은빛물결이 아니라 짙은 자주색의, 갓 피어난 싱그러운 억새의 계절이다.

 개천절 하늘이 열린 날답게, 하늘은 저만치 멀어져있다.
대지에 가을 햇살이 가득 퍼지는 날, 이 아름다운 가을날을 그냥 보내기 아쉬운 일행은 가메옥으로 방향을 잡았다.

▲ 억새 군락 너머로 보이는 가메옥

 가메옥
구좌읍 송당리에 속하는 자그마한 오름이다.
작아도 그냥 작은 정도가 아니라 매우 작은 오름이다.
중산간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해발은 368m라지만, 비고는 불과 28m 밖에 안 된다.

 오름의 모양이 가메(절구가마)이 혹(방아공이가 떨어지는 절구의 우묵한 곳)을 닮았다고 해서 가메옥이라고 하나, 썩 고개가 끄덕여지는 해석은 아니다.

 이름을 짓고 부르면서 뒷사람들이 해석하는 수고까지 염두에 두고 짓지는 않을 터, 그냥 가메옥이라고 불러왔다. 또 앞으로도 그렇게 불릴 것이다.

 번영로를 따라가다가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유명한 선화사거리를 지나 1.3Km를 더 가서 차를 세우면, 왼편으로 자그마한 목장입구가 보인다.

 가메옥으로 가는 길이다.
오름의 크기가 작은 대신에 목장길을 제법 걸어야 한다.
송당리 쪽에서 들어설 수도 있지만 그래도 역시 제법 걸어야 된다.

 구좌읍에만 40여개의 오름이 산재해있고 또 그 중 26개의 오름이 송당리에 위치한다.
제주에서 가장 많은 오름을 갖고 있는 마을이 바로 송당리인데, 이곳 가메옥 주변으로 그나마 넓은 초원이 있어서 마을의 목장으로 쓰인다.
즉 오름이 밀집한 와중에 형성된 평지의 중간에 들어선 오름인 것이다.

 목장의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서자 키 작은 나무들이 즐비한 초원이 우리를 맞이한다.
왼편으로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서검은이오름(검은오름)의 울퉁불퉁한 능선이 넘실대는 파도를 연상시킨다.
오른편에는 특이하게 생긴 알오름(이류구) 두 개가 목장의 지킴이처럼 서있다.

 오래되어 흔적만 남은 농로와 소들이 다니며 만들어진 길을 따라 십여분 쯤 가니 왼편으로 자그마한 오름이 보인다.
얼핏 보면 다른 알오름들과 크기가 비슷해서 별 생각 없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알오름들과는 다르게 북동쪽으로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이 딱 오름이다.
화산이 분출하여 만들어진, 어엿한 분화구를 갖는 오름인 것이다.

▲ 가을의 연인 물매화

 오솔길을 버리고 오름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는다.
언제나 그렇듯 오름 산행의 훼방꾼인 찔레나무와 청미래덩굴이 바짓가랑이를 잡아챈다.
요리조리 소들이 다니며 만들어 놓은 틈새로 비집고 나가는데, 오호라 가을의 연인이라는 물매화 한 송이가 수줍게 꽃망울을 벌리고 있다.
반가운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아직 때가 이른 탓인지 달랑 한 송이뿐이다.

 정상까지는 오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작아도 오름이어서 있을 것은 다 있다.
말굽형 벌어진 굼부리는 깊숙하고, 또 수직의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굼부리 안에는 주변과 달리 커다란 나무들이 무성하고, 돌단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목장에서 소와 말을 키우던 목동들이 소원이라도 빌었던 것일까.

 말굽형 굼부리의 능선을 절반가량 돌고서야 정상이다.
햇살은 아직 따갑지만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멀리 서쪽으로 한라산이 우람하게 서있고, 그 한라산을 부대오름과 부소오름이 옹위하고 있다.
서검은이오름(검은오름) 또한 정상에서 북쪽으로 길게 꼬리를 끌며 누워있다.
저 오름에서 쏟아져 나온 용암이 흘러 이 구좌읍지역에 많은 용암동굴을 만들어 놓았다.
혹여 지금 서있는 발아래에도 동굴이 있을지 모를 일이다.

▲ 억새밭 너머로 보이는 오름군락들

 북동쪽으로는 파노라마같은 스카이라인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수많은 오름들의 능선이 하늘과 만나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곡선들, 청명한 가을하늘을 만나 그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체오름 안돌오름 밧돌오름 높은오름 거슨새미오름 민오름 비치미......

 제주의 아름다움 중에 삼선이라는 것이 있다.
제주의 아름다운 세 가지 곡선을 뜻하는데, 오름곡선 초가지붕곡선 그리고 무덤곡선이라고 한다.
이 오름에서 바라보는 오름들의 곡선미야 말로 최고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 원형 굼부리. 오름의 크기에 비해 분화구의 크기가 커서 카메라에 다 잡히지가 않았다. 에효! 똑딱이의 설움.

 오름의 북쪽으로 내려오는데, 어머나 이런, 이곳에 또 하나의 굼부리가 숨어 숨어있었네.
산허리에 커다란 원형 굼부리가 나타난다.
작디작은 오름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렇듯 두 개의 분화구를 간직하고 있는 오름이었다.
얕봤던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원형굼부리의 반을 돌고 내려왔다.

 이 섬과 한라산 그리고 오름을 만들었다는 설문대 할망은 무슨 맘으로 이 오름을 만들었을까.
오름을 만들기 전에 미리 모형으로 만들어 봤을까.
아니면 다 만들고 나서 아이들을 위해 이 앙증맞은 오름을 빚어 놓았을까.

 드넓은 억새군락에서 바라보는 가메옥은, 아이들이 물에 띄워놓은 종이배 같은 모습이었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