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병이 하나있다.

 어느 날 아침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손을 넣었을 때, 세숫물이 선뜻 얼굴로 안 올라오고 물이 차갑다고 느껴질 때면,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안절부절 엉덩이가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괜히 배낭도 꾸려보고 가보고 싶은 곳을 머릿속에 떠올려 보기도 하고. 참 오래된 고질병이자 해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계절병이기도 하다. 어쩌면 병까지는 아니고 가을을 타는 나만의 방식인지도 모르겠다.

 주말, 마음이 시키는 대로 가자.

▲ 손지오름 전경

 오름이 밀집한 구좌읍에 한라산의 손자뻘이 된다는 손지오름이 있다.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거미오름 높은오름등, 유명한 오름 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그 족보에 걸맞지 않게 관심이 덜한 서러운 오름이다.

 쳇,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오늘 우리는 따뜻한 마음을 안고 손지오름으로 간다.

 손지오름

 구좌읍 종달리에 속하는 오름이다. 송당리와 가까워서 송당리 오름으로 알기 쉬운데, 굳이 인간들이 그어 놓은 선을 따라 분류하자면 종달리이다. 뭐 오름의 입장에서 보면 별 의미는 없는 금 긋기이긴 하지만.

▲ 오름사면에 억새가 장관이다.

 멀리서 보면 한라산을 닮았는데 크기가 작다하여, 한라산의 손자라고 손지오름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그런데 필부의 눈에는 어디가 한라산을 닮았다는 것인지 도통 연상이 잘 안되는 게 사실이다.

 또 가시리의 따라비오름을 땅할애비로 해석하여 그 따라비오름의 손자뻘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따라비오름 옆에 장자오름 모자오름 새끼오름등이 있어서 붙은 해석이다.

 한자로는 손자봉(孫子峰) 손지악(孫枝岳)등으로 표기된다. 해발 256m에 76m정도의 비고를 갖는 비교적 나지막한 오름에 속한다.

 오름 왕국의 중심에 해당하는 송당리 사거리에서 중산간도로를 따라 수산리 방면으로 4.5Km 남짓 가면 종달리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오고, 여기에서 오른편으로 보면 오름의 사면에 특이하게도 삼나무가 X자 형태로 심어진 오름이 보인다. 바로 손지오름이다. 오름이 중산간도로에 연해있어서 찾아가기는 무척 쉬운 오름이다.

 보통의 경우 삼나무나 측백나무를 식재할 때 군인들이 사열하는 대형으로 심어 놓은 경우가 많은데, 이곳은 어인일인지 오름의 능선을 따라 한 줄을 심고, 또 오름 자락에 X자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누구의 독특한 취향이었는지는 모를 일이나, 오름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X자 오름이라는 별칭하나를 선사해주었다.

 실제로 오름 이야기를 하다보면 “아~ 그 X자오름?” 하고 되묻는 경우도 있다.

▲ 야고. 엽록소가 없어서 광합성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억새뿌리에 기생하여 영양분을 얻고 꽃을 피운다. 무임승차하여 과실만 챙기는 녀석이다.

 오름 자락으로 들어서자 우리 일행들과 키를 나란히 하는 억새가 가득이다. 바람에 따라 쓸리는 모습이 집단 군무를 추는 것 같기도 하고, 또 다시 보면 파도가 넘실대는 것 같기도 하다.

 봄이면 풀밭에 둥굴레가 군데군데 무리지어 피어나곤 하는 곳인데, 억새의 키에 눌려 흔적도 없다. 억새 밑동에는 얌체 같은 야고가 그래도 미안한 맘은 있었는지, 고개를 숙인 채 부끄러운 듯 피어있다.

 억새사이를 헤치며 오르기를 20여분, 오름이 능선에 올라섰다.

 타원형의 커다란 굼부리가 모습을 드러내는데, 아마도 두 개의 원형굼부리가 잇대어 만들어지면서 타원형이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굼부리를 감싸 안고 600여m의 둥그런 능선길이, 세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며 이어진다. 한 개의 봉우리는 밋밋한데 반해서 두 개의 봉우리는 볼록하게 솟아올랐다. 그래도 정상은 솟아올라야 제격이어서 북동쪽 봉우리를 정상으로 삼아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 손지오름에서 바라본 용눈이오름

 맑은 하늘에 가을바람이 시원하다.

 북쪽 너머에 오름 왕국의 여왕이라는 다랑쉬오름이 기품과 위용을 자랑한다. 풍성한 치마폭이 연상되기도 하는 모습이다.

 동쪽 멀리에는 이 섬을 지키는 든든한 성채, 성산이 든든히 버티고 서 있고, 부르면 들릴 듯 가까이에는 용눈이오름이 누워있다. 세 개가 굼부리가 연달아 있는 모습이 용이 누웠던 곳이라 하여 용눈이오름인데, 여기에서 보니 오름 자체가 누워있는 모습이다. 매끄러운 오름이다. 곡선도 매끄럽고 풀밭도 매끄럽다. 만약 저곳에 산림녹화 한다고 나무를 심었다면 어찌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

 온 나라가 산림녹화 한다고 삽자루와 묘목을 들고 산으로 가던 시기에 용케도 잘 지켜낸 오름이다.

 어쩌면 이 손지오름에 심어진 X자모양의 삼나무도 획일적인 행정에 대한 불만의 소심한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서쪽에는 이 일대에서 가장 높다는 높은오름이 우뚝 솟았다. 문득 바라보니 어느새 오름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