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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돌담이의 오름이야기(5)자배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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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9.19  14:2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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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의 시작이라는 뉴스와 함께 어제는 비가 제법 많이 내려 조바심을 치게 하더니 찌푸린 날씨나마 비가 그쳐 안도하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만에 나서는 오름길이다.

 구름에 쌓인 한라산의 모습에 5.16도로를 포기하고 일직선으로 쭉 뻗은 남조로를 따라 수망리 사거리에서 우회전을 하니 1136번 도로가 나온다. 이른바 중산간도로, 어르신들은 '웃한질'이라고 부르는 길이다.

 -제주의 주요도로를 살펴보면 먼저 일주도로가 있다. 일제시절에 새로 만들어져서 신작로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제주도 해안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길이다. 그 위쪽에 중산간 마을을 따라 섬을 한 바퀴 도는 중산간 도로가 있고, 조선시대 제주목과 대정현을 잇는 관도였던 평화로, 또 제주목과 정의현을 이어주던 길 번영로가 있다. 그리고 한라산을 넘어 산북과 산남을 이어주는 1100도로와 5·16도로가 있다. 이 여섯 개의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개발바람을 타고 수많을 길들이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각설하고, 수망리 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서귀포 방면으로 5Km를 가니 오른편에 자배봉이라는 안내판이 서있고, 승용차 예닐곱 대는 족히 세워둘만한 자그마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비교적 자세하게 오름이 설명되어 있다.

 자배봉.
해발고도가 약 211M, 비고가 111M로 낮지 않은 오름인데도 넓고 펑퍼짐해서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자배봉의 어원은 구실잣밤나무를 제주에서는 조밤낭 또는 조배낭등으로 불리는데, 이 오름 남서쪽 안부리에 군락을 지어 자생한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인데,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다 보니 한자로 표기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음을 차용하여 이두 식으로 자배봉(資輩峰 또는 資盃峰) 이라고 표기하였다. 인근 마을 사람들은 봉수대가 있었음으로 해서 망오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오르막 길과 능선길이 만나는 곳에 수문장을 만들어 놨다
 차를 세운 뒤편으로 나무계단이 마련되어 있고 몇 걸음을 올라서면 폐타이어를 이용한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또 초입에는 주변 마을 사람들을 위한 간단한 운동시설들도 마련되어있다. 아마도 인근 사람들이 운동 삼아 많이 다니는 듯하다. 십여분 오르막을 오르니 능선 길과 만나는데 이 능선길 초입에 마치 수문장이 서있듯 돌탑이 서있다. 주변을 살펴보니 입구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돌탑이 많이도 쌓아져 있다. 무슨 소망이 그리도 많았던지... 척박한 땅에서 험한 자연과 맞서며 살아왔던 삶들이 세운 탑일 것이다.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붉은 화산석이 다른 오름들 보다 유독 많기도 하다.

   
▲ 누군가의 소망과 기원을 담은 돌탑들
 바닥에는 백량금을 비롯한 키 작은 식물들이 가득하고, 산 전체엔 삼나무 해송 상수리나무 편백나무 예덕나무등이 숲을 이루어 하늘을 가리고 있다.

 십여 분을 더 가니 하늘이 트이면서 북쪽으로 시야가 열리고 삼각점이 박혀있다. 여기가 정상이다. 맑은 날엔 여기에 서면 한라산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는데, 오늘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구름과 안개 속에 자취를 감추었다. 발아래로는 거대한 굼부리가 펼쳐지는데 그 크기가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 굼부리 안으로는 많은 나무들과 청미래덩굴, 찔레덩굴이 엉켜서 정글을 이루었다. 예전에 '오름 나그네'를 쓰신 김종철님은 이 정글 속에 들어 가셨나보다. "걸리지 않는 덩굴, 막히지 않는 덤불이 없어서 도망치듯 능선으로 올라왔을 땐 생지옥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오름에서는 보기드물게 고인돌이 있다
 능선 길을 따라 걷다보니 오름에서는 보기 드물게 고인돌이 있다. 고인돌 하면 크고 웅장한, 그래서 권력을 상징하는 것들만을 연상하기 쉽지만 이 섬에는 그리 크지 않은 고인돌들이 많이 산재해있다. 물론 큰 권력은 아니지만 이정도의 무덤이라도 만들라치면 제법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것이고 그러려면 말 빨이나 서는 사람의 무덤이었으리라.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에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라고 배웠었지만 문화의 전파속도가 늦었던 이 섬의 경우에는 그 훗날까지도 무덤의 양식으로 사용되었다.

 숲길을 십여분 더 가니 안내판과 함께 제법 선명한 형태의 봉수대가 나온다. 제주의 방어시설로는 아홉 곳의 진과 스물다섯개의 봉수대 그리고 서른여덟개의 연대가 있었다고 한다. 진에는 군사가 주둔하였고, 봉수대와 연대는 비슷하데 그 역할이 달랐다. 즉 연대는 바닷가에 위치하여 접근하는 선박이 우리 어선인지 왜구인지 감시하다가 적변이 있을 때 봉수대로 알리면, 봉수대는 이를 빠르게 진으로 연락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고 날씨가 많이 나쁘면 말을 달리기도 하였다.

 봉수대에 올라서니 초여름의 남쪽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잔잔한 바다위엔 지귀도가 외롭게 테우 모양으로 떠있다.

 이 오름 남녘에는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고좌수 파혈터’라는 무덤이 있었다고 한다. 위미 윗마을 고좌수가 죽었는데 지관이 가르쳐준 대로 그 아내가 몰래 관을 뒤집어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그 뒤로 두 아들이 괴력의 장사로 성장하였는데 두 아들이 그 비밀을 알고는 무덤을 파헤쳐보니 관은 보이지 않고 황새 한 마리가 날아올랐다. 그 이후 이 집안은 가세가 기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 오름전문가 김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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