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도에는 두 개의 계절이 공존한다.

차로 한 시간의 거리를 두고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날씨가 판이하게 다른 것이다.

제주시에서의 날씨만 생각하고 두툼하게 차려입고 서귀포로 넘어갔다가는 바보취급당하기 일쑤다.

북풍한설이 한라산을 넘지 못하고 산북에만 눈을 뿌려댄다니 가히 한라산의 크기와 위용이 새삼 느껴진다.

얼마 전 뉴스에서, 기상청이 발표하기를 서귀포에는 겨울이 없어졌다 하니 이제 공식적으로도 제주는 겨울과 봄 두개의 계절이 공존하는 섬이 된 것이다.

오늘 우리는 겨울을 떠나 봄으로의 여행을 위해 따뜻한 남쪽나라 서귀포에 있는 각시바우오름으로 간다.

▲ 고근산에서 바라본 각시바우오름. 뒤편에 보이는 오름은 쌀오름이다.

각시바우오름.

하나의 오름을 두고 여기처럼 많은 이름과 해석이 있는 곳도 드물다.

자식을 바랐던 여인의 한이 전설로 남아서 각시바우,각씨암(角氏岩) 처암(妻暗)등으로 불리고, 오름의 모양이 두 개의 뿔이 돋아난 형상이라서 각수악(角秀岳) 각수암(角首岩)등으로 불리고, 마지막으로는 두 개의 연이은 봉우리가 학의 날개를 편 듯한 모양이라고 해서 학수바우 학수암(鶴首岩)등으로 불린다.

일반적으로 오름을 소개하는 곳에서는 주로 각시바우로 불리고 행정기관에서 붙인 명칭들에서는 학수암이라는 이름이 많이 보인다.

서귀포시 호근동과 서홍동의 경계에 위치하는 오름이다. 해발 395m, 비고는 140m 정도로 제주에 흔한 현무암 대신 조면암으로 이루어진 오름이다.

서귀포시 신시가지에 있는 강창학구장에서 1136번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면 고근산 입구를 지나고 왼편에 학수로라는 표지가 나온다. 학수로라는 도로 명에서도 짐작이 갈 터인데, 이 길로 들어서면 영산사를 찾아가는 푯말들이 서 있다. 이 표지를 따라 1.5Km,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라가면 영산사가 나오고 산행의 기점이 된다. 이외에 산록도로에서 호근동 공동묘지를 거쳐서 오름에 이를 수도 있다.

▲ 동백꽃이 화사하게 피어났다.

제주시에서는 가냘프나마 눈발이 흩어지던 날씨였는데, 서귀포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볼을 희롱하는 바람 또한 봄 냄새가 물씬해서 외투 하나를 벗어서 배낭 속에 우겨넣어야 했다.

영산사 입구에 커다란 동백나무가 빨간 꽃을 주렁주렁 달고 섰다. 어릴 적 저 동백꽃을 따내고 꽃받힘에 고인 꿀을 입에 털어 넣던 생각이 나서 한번 시도해보려다 포기했다. 날이 추워서 벌과 나비가 귀할 때 얘기이지 이렇게 날이 따뜻한데 우리 몫이 남아있을리가 없을 터이다.

길은 사찰 옆 좁은 계곡으로 이어진다. 온통 바닥이 조면암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습기가 있는 날이면 꽤나 미끄러울 정도이다.

사방이 온통 울창한 상록수림으로 가득해서 계절을 느껴볼 수 없는 곳이다. 바닥 또한 초록의 양치류가 한 여름 못지않게 무성하다.

여기저기 키 작은 백량금이 빨간 열매를 달고 있는 모습 또한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 백량금이 빨간 열매를 달고 있다.

같은 제주도이지만 날씨만 다른 것이 아니라 숲속의 풍경 역시 확연히 다르다.

십여분 올라가니 포제단이 나오고 학수암 푯말과 함께 정비된 등산로가 기다린다. 여기서 다시 십여 분을 걷고 마지막에 바위를 기어올라 동쪽 봉우리에 올라섰다. 암봉의 남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고소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올라서기 어려울 지경이다. 하지만 시야가 트이면서 나타나는 광경에 모두들 탄성을 지른다.

고소공포증은 무슨. 펼쳐지는 아름다움이 모든 것을 상쇄하고도 남는데.

▲ 각시바우에서 내려다본 서귀포시 전경.

남쪽으로 옥색의 바다가 눈이 부시게 펼쳐진다.

그리고 그 품에 안긴 서귀포시가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아늑한 도시이다. 앞 바다에는 섶섬 문섬 범섬이 차례로 떠 있는 모습이 혹시 있을지 모를 바다의 나쁜 기운으로부터 이 도시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동쪽 이웃에는 쌀오름이 서 있고, 남녘에는 오름의 정형과도 같은 모습을 갖춘 고근산이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눈을 뒤로 돌리면 이런 서귀포가 있도록 만든 한라산이 장엄하다. 눈구름이 이 산을 넘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알프스를 넘으려는 나폴레옹의 군대처럼. 지키려는 한라산의 산세 또한 만만치 않아서, 백록담을 겨우 넘은 눈구름은 남벽 언저리에서 흩어져 마감하고 있을 뿐이다.

한라산과 바다의 섬들로 지켜지는 이 도시에 하늘에서 축복과도 같은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다. 어찌 아름다운 도시가 아닐 수 있을까.

각시바우에서 바라본 한라산의 모습. 구름이 한라산을 상대로 공성전을 치르는 형국이다.

바위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밧줄이 메어 있어서 내려가니 동굴이 하나 있는데, 이 축복받은 도시에도 무슨 바램들이 많았는지 소원을 빌던 흔적들이 가득하다.

괴물의 뿔처럼 돋아난 두 개의 봉우리 중 하나만 돌아보고 오면 한쪽 뿔이 질투하여 부정 탈것 같아서 서쪽봉우리로 향한다.

두 봉우리 사이 그러니까 이마쯤에 해당하는 곳에, 커다란 바위 두 개를 병풍삼아 누운 오래된 묘 두 기가 눈에 띈다.

풍수에 문외한인 이 범부의 눈에도 아늑해 보이는 묏터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서봉은 동봉에 비해 터도 넓지 않고 나무가 가득하여 시야도 썩 좋은 편이 아니나 길이 반듯하게 나 있는 모습이 사람들의 발길이 꾸준한 듯하다. 한곳만 돌아보고 오기엔 뭔가 잃어버린 듯한 찜찜한 심정이 모두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제 발길을 되돌려 하산 길에 나선다.

따뜻한 날씨와 연중 푸른 상록수림, 그리고 쪽빛 바다 오늘 우리는 겨우 한 시간을 달려 먼 남쪽나라를 여행한 듯하다.

이것 역시 제주도에 사는 이들이 누리는 행복일 것이다.<제주레저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