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셔브룸 1봉을 배경으로 펼쳐진 파키스탄 히말라야 풍경 사진제공 설암산악회

기록적 가뭄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제주섬은 유례없는 폭염과 열대야에 시달렸다. 그 여름을 히말라야 고봉에서 영하 4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와 싸우던 이들이 있었다. ‘2013한라에서 가셔브룸으로 가는 한국설암원정대(대장 이창백)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7월 17일 저녁 7시, 해발 7,300미터 제3캠프에는 고경만 등반대장과 김영용, 이경용 대원이 세르파 2명과 함께 정상을 향한 마지막 발걸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출발 예정시각은 오후 10시. 정상까지 예상시간은 대략 15시간, 강행군이었다.

정상 눈앞에 두고 대만팀 구조 요청 들어오다

정상 등정을 목전에 두었던 그 시각, 대만팀 대원이 다급하게 캠프로 달려왔다. 설암원정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정상등정을 마치고 하산하던 대만 팀 2명이 해발 7,700미터에서 추락, 갈비뼈가 부러지고 피를 토하며 있다며 신속한 구조를 요청하는 것이다.

하룻밤을 그곳에서 식량과 장비도 없이 비박을 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당시 제3캠프에는 설암원정대와 또 다른 한국팀인 김영미팀, 그리고 유럽 아미칼 상업등반대가 모여 있었다. 다급한 상황에서 고경만 등반대장은 베이스캠프에 있는 이창백 원정대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대장은 우선 캠프3에 있는 여러 팀들과 합동구조대를 꾸리기를 주문했다.

그러나 유럽 아미칼 상업등반팀은 단호히 거절했다. 상업등반대는 최근 유행하는 등반의 풍조로, 고산등반 전문회사가 돈을 받고 고객들을 정상으로 이끄는 것으로 일종의 사업이다. 고객들 대부분 현지에서 처음 만나는 이들인데다가 등반대의 목표는 오직 정상 등정이어서 다른 팀의 사고에 적극 대처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죽음의 지대에서 타인을 구조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은 스스로 목숨을 거는 행위와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 캠프3 사진제공 설암산악회

등정과 구조의 기로

설암원정대는 난감했다. 몇 년을 벼려온 원정등반인데 정상 등정 목전에서 등정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이창백 원정대장은 제3캠프에 있는 대원들에게 무전을 날렸다. “시간이 다급하다. 정상 등정 공격조가 판단해라. 사람을 구할 것인지, 등정을 할 것인지. 다만 우리가 등반에 앞서 등반가로서 기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점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판단하기 바란다.” 속으로는 구조 먼저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원들 스스로 현명한 판단을 내리기를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베이스캠프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대만팀 원정대장은 애타는 가슴으로 제3캠프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에 하나 구조작업에 참여할 수 없다면, 정상 공격 시간을 앞당겨서라도 정상 등정 중 사고지점에 생존에 필요한 산소통과 식량, 보온장비라도 보내달라고 간절히 부탁하던 터였다. 그 때 제3캠프로부터 무전이 울렸다.

▲ 캠프1에서 (우)고경만 등반대장과 (좌)김영용 대원 사진제공 설암산악회

“대장님, 정상 포기하고 구조팀 보내겠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정상에 가더라도 평생 짐이 될 것 같습니다.” 베이스캠프에 활기찬 탄성이 퍼졌다. 대만팀과 설암원정대의 통역을 맡았던 김미곤팀 모두가 제3캠프의 구조 결정에 환호성을 질렀다. 고경만 등반대장은 상게와 도르지 세르파에게 구조활동에 참여하면 정상 등정을 한 것과 동일한 게런티를 약속하며 구조작업 참여를 설득했다. 세르파들은 히말라야 등지에서 돈을 받고 일하는 고산 등반 가이드로, 등정 성공 시에는 특별보너스를 지급받는다.

등정보다 힘들었던 죽음의 지대에서의 구조

밤 8시 30분경부터 구조 작업은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비상식량과 산소통, 침낭과 텐트를 지니고 사고 예상 지점으로 7시간 30분을 올라가 조난자들을 찾았다. 새벽녘 다행히 날씨는 좋았고 산소를 공급받은 대만팀 부상자는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동이 트는 대로 대만팀 이 하산을 할 수 있다는 무전이 베이스캠프로 날아들었다. 새벽 1시 경 베이스캠프로 위성전화가 왔다. 대한산악연맹 배경미 이사의 전화였다. 대한산악연맹의 이인정 회장이 대만 등반팀의 구조에 한국팀들이 적극 지원을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구조작업은 시작되었고, 베이스캠프에서 구조팀도 제3캠프로 올려 보낸 뒤였다.

▲ 이창백 원정대장과 대만팀 귀환자가 베이스캠프에서 등정축하주를 마시고 있다. 사진제공 설암산악회

제3캠프로 대만팀이 무사히 귀환하자 설암원정대 대원들은 2차 공격을 위해 베이스캠프로 하산을 시작했다. 대만팀들은 휴식을 더 취한 후 하산 예정이었다. 하산 길에 가셔브룸 봉우리 상단이 붉게 빛나는 게 보였다. 구조작업이 아니었더라면 지금쯤 바로 ‘빛나는 산’이라는 뜻을 지닌 가셔브룸 정상에서 등정의 환희를 맛보고 있을 터였다. 설암원정대가 베이스캠프로 귀환한 다음날인 19일 대만팀 조난자들과 구조팀들이 모두 안전하게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대만 대원들은 목에 꽃다발을 두르고 등정과 생환의 기쁨을 만끽했고, 베이스캠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축하의 박수를 쳤다.

▲ 마지막 공격 전 김영용 대원과 김영미팀의 최정명 사진제공 설암산악회

며칠 동안 폭설이 내렸고 베이스캠프에서 휴식을 취한 설암원정대는 24일 마지막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 다시 캠프로 올라갔다. 날씨가 나빴지만 더 이상 좋은 날씨를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26일 밤 9시, 원정대는 마지막 정상 공격에 나섰다. 며칠간의 휴식으로 컨디션을 회복해서 정상 등정의 가능성이 비쳤다.

그러나 해발 7,700미터 ‘차이나릿지’라 불리는 마의 고개에 도착한 새벽 3시 30분경 갑자기 사나운 바람과 눈보라가 몰아쳤다. 서 있기조차 힘든 바람 때문에 더 이상 전진이 어려웠다. 엉덩이를 걸친 만한 웅덩이를 파고 배낭을 바람막이 삼아 1시간을 버텼지만 바람은 그칠 기미가 없었다. 원정대는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미련은 남았지만 등반은 후회가 없었다. 최선을 다했고 진정 성공한 등반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 유명한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의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라는 독백처럼.

▲ 사진제공 설암산악회

진정한 용기한 필요했던 아름다운 철수

제3캠프에 있었던 텐트 10동 중 3동만 남기고 모두 강풍에 날아가 버렸다. 제2캠프와 제1캠프에도 성한 텐트들이 없을 정도로 바람의 위력은 셌다. 눈보라 몰아치는 고산은 그래서 산악인들 사이에서 죽음의 지대로 불리는 것이다.

지난 9월 15일은 제주 출신의 고상돈 산악인이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선 날이다. 이 기념비적인 등정을 기념하기 위해 대한산악연맹에서는 9월 15일을 산악인의 날로 지정하여 그날을 기념하는 행사를 연다. 그리고 올해 산악인의 날 행사에서는 특별한 이벤트가 열렸다. 바로 한국설암원정대에게 아시아산악연맹 회장이 감사패를 전달한 것이다. 대만등산협회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가셔브룸 원정에서 자신들의 등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자국의 조난자를 구조해준 한국설암원정대의 헌신적인 희생정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이번에 조난당했던 대만 대원들은 대만등산협회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히말라야에 도전하고 있던 기대주였다.

▲ 캠프2-3로 오르는 길 사진제공 설암산악회

1786년 유럽 최고봉 몽블랑 등정으로 근대 등반이 시작된 이래 인류는 알프스와 히말라야 등 고산 등반이 시작된다. 이러한 등반을 알피니즘이라 부르는데 알피니즘에는 산을 오르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산을 대하는 인간 정신에도 중요한 방점을 둔다. 진정한 알피니즘이란 산을 오르는 이들의 마음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산악인들은 산에서 조난에 처한 이들을 우선 구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최근 히말라야 등지에 상업등반대들의 진출이 늘어나고 경쟁적 등반의 성행으로 인해 이러한 산악인들의 구조를 우선하는 정신이 다소 퇴색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나 한국설암원정대는 히말라야 죽음의 지대에서 비록 등정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등정보다 소중한 아름다운 인간애를 꽃피우며 휴먼드라마를 이뤘다.

오희삼 제주특별자치도산악연맹 학술문화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