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요경마가 열린 지난 18일. 제주경마공원 마권판매장이 북적이고 있다.

장면 1. 80대로 보이는 백발의 한 할머니가 모자를 눌러 쓰고 홀로 계단에 앉아 경주마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 손에 쥔 경마정보지엔 메모 자국이 가득했다. 오늘은 운이 좋지 않았는지 표정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장면 2. KRA한국마사회 제주경마공원 내 한 음식점. 6000원짜리 류산슬 덮밥 식권을 사고 배식구에 내밀자 5초가 채 걸리지 않고 음식이 나왔다. 1분 1초를 아까워하는 경마팬들을 위한 배려인 것 같았다. 음식점을 둘러보니 혼자 밥을 먹은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뭐가 그리 급한지 허겁지겁 먹어댔다. 표정이 비장해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경마정보지를 들여다보면서 밥을 먹는데 5분도 걸리지 않는 듯 했다.

장면 3. 야외관람대는 흡사 흡연실을 방불케 했다. 너나 할 것 없이 담배를 물고 경마정보지와 경주마를 들여다보기 바빴다. 전광판에 마감 5분전이란 단어가 뜨자 마권을 사는 창구가 순식간에 북새통이 됐다. 판매가 마감돼 마권을 사지 못한 한 경마팬은 울상을 짓기도 했다. 

지난 18일 금요경마가 열린 제주경마장의 풍경이다. 

주중인데도 불구하고 주차장이 가득차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주차를 할 수 있었다. 주차장이 가득 찼지만 관광객이 타고 온 렌터카는 보기 힘들었다. 관광객이 얼마나 왔을까 궁금해 이러 저리 번호판을 둘러보았지만 '허'자로 시작하는 렌터카는 고작 5대만을 찾을 수 있었다. 유난히 택시와 농사용 트럭이 많이 보였다. 경마장 입장객 대부분이 도민들인 듯 했다.

▲ 경마 경주가 18일 제주경마공원에서 열리고 있다.

경마장내에 들어서니 '경마팬'이 아닌 '도박꾼'을 보는 듯했다. 웃음도 사라진 공간이었다. 극도의 긴장감과 피로감, 살벌함이 뒤섞여 있었다.

경마장내 2층과 3층 관람대엔 빈자리도 찾을 수 없었다.

70대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는 "1시간 30분을 기다려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경마장 야외에 자리 잡은 한 편의점 앞에서 5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출입문에 서서 사발면을 먹고 있었다. 눈은 한 순간이라도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전광판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겨드랑이엔 경마정보지도 끼고 있었다. 그 여성도 역시 혼자였다.

어린이 놀이방엔 아이들이 경마공원 직원들과 놀고 있었다. 경마에 집중하기 위해 부모들이 아이들을 맡긴 것 같았다.

▲ 80대 할아버지들도 경마공원 바닥에 주저앉아 경마에 열중하고 있다.

기자도 경마에 어떤 매력이 있을지 궁금해 안내 직원의 도움을 받고 5000원을 연승식으로 걸었다. 결과는 금세 휴지조각이 됐다.

다시 한 번 도전하고 싶었지만 나까지 경마중독의 길로 접어드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앞서 꾹 참았다.

경마장 벽엔 한국마사회 명의의 "현금지급이 줄이 길지 않으세요. 계좌 전용 창구에서 자유롭게 입출금 하세요. 마이카드 회원 등록' 문구가 친절하게 붙여져 있었다.

한 게임당 한 사람의 최대 배팅 한도가 10만원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마권을 사기 위해선 아무런 확인절차도 없어 무용지물인 듯 했다.

▲ 휠체어를 타고 온 한 장애인이 경마에 열중하고 있다.

이날 경주는 모두 8 경주가 열렸다. 낮 12시 45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이어졌다. 매 경기마다 배팅액은 2억원을 가볍게 넘었다. 이날 하루 배팅액만 20억원은 될 듯 싶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70대 할아버지는 "돈을 많이 땄나"는 기자의 질문에 "매일 잃는다"며 "안 오면 자꾸 생각나 매번 찾는다.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다. 마약 같다"고 푸념했다.

'경마공원'이 아닌 '도박공원'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한 경주마다 2억원이 넘는 액수가 판돈이 걸리는 공인받은 '도박장'으로 보였다. '가문의 원수에겐 경마를 소개하면 게임 끝'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 했다. <제주레저신문>

▲ 홀로 온 한 80대 할머니가 경마 정보지를 들여다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