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오름 전경

올해 같은 장마는 처음 겪어본다. 아무리 마른장마라고해도 몇 차례는 비도 오고, 또 비가 오지 않는 날이라도 제주도식 표현으로 ‘마가 친다’라고 하여 안개비가 감싸곤 하는 법인데, 올 장마는 하늘이 아예 가을하늘이다.

파란하늘과 하얀 구름이 예쁘기는 하다. 하지만 이글거리는 태양은 이제 얄밉기 그지없다. 바람조차 없는 날, 무덥고 갑갑한 도시를 벗어나 숲이 있는 오름으로 떠나고자한다.

제주에는 민오름으로 불리는 오름이 다섯이나 있다. 제주시 오라동 민오름, 봉개동 민오름, 또 조천읍 선흘리 민오름, 구좌읍 송당리 민오름, 그리고 남녘 남원읍 수망리에 민오름이 있다. 지금이야 교통도 좋아지고 세상이 좁아져서 이렇게 오름 이름 앞에 지명을 접두사로 붙여줘야 구분이 되지만, 농사만 짓고 살던 옛적이야 멀리 교류할 일도 별로 없는 터라 같은 이름이 있어도 불편 없이 사용되었을 터이다.

오늘은 그중 막내격인 수망리 민오름으로 간다. 막내라고 하면 비고가 가장 낮다는 점도 있지만 사실 비고는 별로 큰 차이가 없고, 가장 인가와 멀리 떨어진 오름이다보니 발길이 가장 뜸하다는 뜻일 것이다. 서성로가 개설되기 이전에는 참 먼 길을 헤매고 나서야 기슭에 닿던 오름이다. 위에 적은대로 남원읍 수망리에 속하는 오름이다. 해발 447m, 비고는 약 100m 정도이다. 동쪽으로 벌어진 말굽형의 오름이나 울창한 나무로 인해 잘 식별되지는 않는다.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라고 하여 민오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자 음을 차용해 敏岳 이라고 표기하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민악산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이름이 무색하게 삼나무와 측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산림녹화 영향일 것이다.

남조로와 서성로가 만나는 수망사거리에서 5.16도로 방면으로 우회전하여 1Km 남짓 가면 오른쪽으로 난 농로가 나오는데, 이 길로 들어서면 이내 두 갈래 길이 나온다. 여기서 왼편 길을 택하여 2.2Km를 더 가면, 이 길이 맞긴 맞나 살짝 걱정이 들 무렵 오름 하나가 버티고 선 것이 보인다. 또 왼편으로 보면 주차장이라고 하기엔 안쓰러운 공간도 있다. 그래도 주차장이라고 잔자갈을 곱게 펴서 차를 편히 세울 수 있도록 배려를 하였다.

▲ 등산로 입구

인적이 드믄 탓에 등산로 입구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있다. 초봄과 늦가을 산불방지 기간에는 입산을 통제하는 현수막도 걸려있다. 아마도 지난해 가을에 걸어 놓은 것인 듯. 오름 입구엔 관리단체를 알리는 표지판도 세우고, 철조망을 지나는 장치도 설치해 놓은 것이 제법 신경을 썼지만 찾는 이는 별로 없는지 입구부터 풀이 무성하다. 고사리가 허리에 이를 정도로 자랐다.

우려도 잠시 입구를 넘어서자 울창한 삼나무 숲 사이로 오솔길이 이어진다. 숲이 주는 알싸한 향에 심호흡을 몇 번 하고 길을 따라 걷는 발걸음이 자못 상쾌하다. 길도 더위에 지친 나그네를 배려했음인지 직선으로 내지 않고 비스듬히 내어 경사를 낮춰 놓았다.

▲ 중간 중간 나타나는 나무계단이 등산로임을 확인시켜 준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길을 흔적에 의지해 더듬듯 찾아 걷다보면 나무계단이 나타나곤 하는데, 마치 “잘 찾아 오셨어요.” 하곤 어깨라도 토닥거려 주는 느낌이다. 아무래도 인적이 많지 않은 듯, ‘청미래덩굴’이라는 녀석이 나무계단 사이에서도 천방지축 자랐다. 불편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시가 달린 놈이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몇 차례 나무계단의 격려를 받는 사이, 하늘을 향하는 계단이 나타나고 양 옆으로 밧줄까지 설치해 놓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임을 직감한다.

이내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다. 햇볕에 대한 우려와 달리 시원한 바람이 먼저 맞이한다. 시내에서는 미동도 하지 않던 바람이 여기 오름의 정상에는 제법 시원스레 불어온다. 정상은 이삼십 미터 정도의 길쭉한 풀밭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온통 삼나무와 측백나무가 가득한 오름이지만, 이렇게 정상엔 여유를 두어 눈마저 시원함을 느끼도록 해놓았구나...

▲ 정상에서 보이는 한라산 모습

서쪽 이웃엔 커다란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거린오름이 우람하고, 그 너머 멀리엔 한라산이 의젓하다. 동쪽으로는 길 건너 물영아리오름을 비롯한 수많은 오름 들이 산재해 있다. 남쪽은 태평양이다. 속칭 ‘지꾸섬’ 이라고 불리는 지귀도가 평온하게 그 바다에 누워있다.

풀밭 중간에 서있는 나무를 햇빛 가리개로 삼아 잠시 앉았다. 팔을 벌리니 겨드랑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지나간다. 나무숲이 주는 싸한 향기와 시원한 그늘. 그리고 정상에 부는 바람과 시원한 정경. 이야말로 여름에 느낄 수 있는 행복이 아니겠는가.